황흥구 인천지방행정동우회 부회장
황흥구 인천지방행정동우회 부회장

아들이 직장관계로 서울에서 잠시 전세를 살다 다시 집으로 오게 됐다. 인터넷으로 전출신고를 했는데, 가구주 확인이 필요하다며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를 해 달라는 것이다. 예전 같지 않고 요즈음은 왜 이리 ‘주민센터’가 붐비는지, 전입신고 하러 왔다고 하니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고 본인 확인은 물론 신고서에 꼼꼼히 기재하고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아들의 심부름을 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흡족했다. 나도 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집에서 인터넷으로 하고 싶었지만 굳이 가서 하기로 한 것은 예전 아버지가 내 심부름을 할 때의 그 심정을 느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나도 처음 취업해 근무하던 곳이 동사무소였지만 주민등록초본이 필요하거나 인감증명 등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께 종종 부탁드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진 기다렸다는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그날로 서류를 떼어다 주셨다. 농사를 지으면서 염전까지 다니시랴 한가한 날이 없으셨는데도 모든 일을 전폐하고 동사무소로 달려가 자식의 부탁을 한 번도 미룬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열일을 제치시고 동사무소를 찾아가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아들이 하는 일을 보러 가는 것이다. 같은 동사무소는 아니었어도 같은 시기에 나는 ‘중구 율목동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내가 고등학교 졸업 후 어느 공장이라도 취직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뜻밖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것은 큰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동사무소에 가면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며 우리 아들도 이런 사무를 보고 있구나 싶어 큰 자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주민센터’에 오니 예전 근무하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40여 년을 인천시 공무원으로 있다 정년퇴직했지만 처음 공직에 들어와 동사무소에서 근무할 때가 가장 그립다. 고3 때인 만 18세에 들어와 뭘 알았을까? 행정의 기본도 모르면서 그냥저냥 견뎌 낸 것은 동료들의 가르침과 당시 훌륭한 동장님들을 만난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누구나 처음 발령받으면 동사무소에 배치됐는데 거의 7∼8년을 여섯 군데의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생각나는 분은 역시 1970년 11월 15일 첫 발령지인 중구 율목동의 ‘유경준(兪慶濬)’ 동장님과 마지막 동(洞) 근무지였던 중구 북성동의 ‘오병현(吳炳鉉)’ 동장님으로서 내 인생의 소중한 인연이자 멘토 같은 분이셨다.

유경준 동장님은 마치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당시 나는 인천의 끝자락인 고잔동에서 율목동까지 수인선기차로 출근했는데, 잦은 연착으로 지각생으로 낙인이 찍히자 어느 날은 동장님이 내 캐비닛 서류를 미리 꺼내 놓고 출입문 밖에서 기다리다 함께 관내 순찰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감싸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동사무소에 근무한 곳은 1981년 7급으로 승진돼 시청에 근무하다 발령받은 중구 북성동이다. 시인 공초 ‘오상순’을 연상케 하는 ‘오병현’ 동장님은 줄담배의 골초지만 술은 한 방울도 못하는 기인이셨다. 황해도 ‘은율’에서 피란 내려 온 ‘켈로부대’ 출신으로 항상 꼬질꼬질한 점퍼를 입고 동네를 순시하다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인간미 넘치는 휴머니스트였다. 

당시 서정쇄신의 서슬이 시퍼럴 때인데 연안부두가 ‘인천역’ 뒤에 있을 때 주택가까지 퍼져 있는 윤락촌을 정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가고 정비한 공로로 ‘중앙일보사’에서 주는 ‘청백봉사상’을 수상하게 됐는데, 이것은 순전히 동장님 덕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시청에 근무하면서 계장, 과장, 관장, 대학사무처장, 부구청장, 교육원장 등을 두루 거쳤지만 동장 한 번 못해 보고 퇴직한 것은 자못 아쉽다. 지금까지 공무원들의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됐지만 처음 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열심히 일했던 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당시 동장님들의 직원과 동민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신뢰하고 책임지는 자세와 투철한 사명감 등이 공직을 수행하는 데 큰 이정표가 됐다. 

정년퇴직한 지금으로는 다시 동장을 해 볼 수는 없어도 열정과 봉사정신을 갖고 나도 가끔은 동장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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