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게 해결해 드립니다, 백조 세탁소
이재인 / 안전가옥 / 1만1천7000원
 

출판사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놓고 구질구질하다고 평가했다. 은조는 화려한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며 서울 언저리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돌연 그 대학이 부실 평가를 받는 바람에 졸업장조차 받지 못하고 고향 세탁소를 운영하는 처지가 된다. 경찰대 수석 입학과 졸업을 자랑하며 한때는 광역수사대 에이스였다는 이정도 형사는 무슨 사연인지 시골 경찰서로 좌천돼 자잘한 신고와 민원에 시달리는 신세다.

재개발에 실패한 오래된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부장으로 잔뼈가 굵은 미숙 부장은 가족을 건사하느라 자신의 패션 따윈 신경도 못 쓰며 살고, 한없이 화려하고 당당해 보이는 세라뷰티 세라 원장은 바람 잘 날 없는 남편 단속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나사 하나 빠진 듯해 보이는 달려라 하니 만화방 캔디 사장님은 두 친구 틈바구니에 끼여서 동네북이 되기 일쑤다. 동네를 순회하며 폐지를 걷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도 그렇다.

하지만 사는 모양이 구차하다고 인생에 재미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은조를 비롯해 소설 속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 인생에 대한 애정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빠르게 현실을 수긍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더라도 해야 할 도리는 다하며 불의에 눈감지 않는다. 그때그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력이 돌고 희망이 깃드는 것은 그런 특유의 에너지 덕분이다.

위기에 빠진 누군가 세탁물에 SOS 신호를 담은 쪽지를 넣어 보냈을 때, 인기 유튜버 실종 사건이나 옷가게 도난 사건이나 불법 도박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폐지 할머니가 다치고 실종됐을 때 은조와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무기력해지거나 외면하는 쪽이 아니라 투덜투덜하면서도 일단 뭐라도 해 보는 쪽에 선다.

작가는 소설 쓰기를 슬슬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 고향 여수에 갔다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이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속에 불꽃을 피운 ‘작고, 사소하고, 평범하고, 느린 것들’이, 그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이 책에 고스란히 차곡차곡 들어차 있다. 독자들은 일단 첫 장을 펼치고 나면 속절없이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휙휙 페이지를 넘겨 순식간에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열렬히 응원하고 응원받은 기분에 고양될 것이다.

어른들은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할까?
비르지니 모르간 / 주니어RHK / 1만3천500원
 

이 책은 일터에 모인 어른들의 하루를 고스란히 담아낸 ‘직업 그림책’이다. 일터로는 아이들에게 친숙한 학교나 병원, 상점을 비롯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위험한 현장, 건설 현장, 농장, 뉴스 편집실 그리고 바다나 산 같은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장소 14곳을 탐색한다. 그리고 110여 명의 어른이 저마다 일터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어떤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지, 사회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소개해 직업에 대한 아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특히 간결한 텍스트와 그림은 유아에서 초등 저학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춤이다.

트랙터 운전사, 전기 기사, 감독, 군인, 헬리콥터 조종사와 같은 직업을 여성으로 그려 전통적인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직업과 활동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이다.

이렇듯 이 책은 직업을 사회 속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해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한 제대로 된 의미를 심어 준다. 꿈과 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아이들과 지혜롭게 진로교육을 하고 싶은 양육자, 교사 모두에게 자신 있게 권한다.

대나무밭에서 자란 소나무
송평종 / 정은출판 / 1만800원
 

이 책은 올해 희수(喜壽)를 기념해 송평종이 펴낸 에세이집으로 인생살이의 보화로 가득하다. 노인 한 분의 삶은 도서관 하나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삶을 통틀어 얻게 되는 지식, 통찰, 혜안이 그만큼 크고 값지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국어 선생님의 칭찬에 힘입어 쉼 없이 기록해 온 진솔한 자기 고백적인 글들이 끝내 값진 보화 밭을 이뤘다.

이 보화 밭에는 자신과 타인의 크고 작은 미성숙한 행동을 통해 얻은 깊은 자기성찰, 한국전쟁 이후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변천해 온 시대상, 자연과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 절정에 이른 과학문명 속에서도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수호, 미래 세대의 복리를 기원하는 애틋한 마음, 바벨탑을 세운 세대 못지않게 교만 가득한 세상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와 창조주에 대한 외경과 감사의 알록달록한 소담한 열매들로 풍성하다.

가난 속에도 희망·사랑·넉넉함이 존재하던 과거 세대와 풍요 속에도 절망·결핍·불행을 외치는 현재 세대, 즉 할아버지와 손자녀들 간에 이해·공감·소통의 다리를 이어줄 만한 책이다.

유성이 흐르는 여름밤에, 눈 쌓인 긴 겨울밤에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면 할아버지의 지혜와 인간미 깃든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귓가에 울려올 것이며, 그대는 선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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