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2013년 중국 옌지시(延吉市)에 있는 옌볜대학교(延邊大學校)에서 교환교수로 체류한 적이 있다. 옌지시는 지린성(吉林省) 내 조선족자치주인 옌볜주(延邊州)의 주도(州都)인데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조선족이 차지하는 인구비율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서 약 30% 내외라고 하는데, 외부 유출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18~19세기 우리의 조상인 당시 조선 사람들이 궁핍과 설움을 피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땅 간도(間島)로 불리던 이 지역으로 많이 이주했으며, 척박한 땅을 일구는 등 숱한 고난을 헤치면서 가까스로 정착했다. 

옌지시와 주변 지역에는 우리 조상들의 얼과 피·땀·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적 장소들이 산재해 있다. 가 볼 만한 곳으로는 백두산, 두만강,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 항일투쟁 사적지, 윤동주 시인의 생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해란강 등이다. 이런 곳을 방문해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고난의 발자취를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아려 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특히나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 너머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쳐다보면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차라리 부러워지면서 남북 분단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한편, 백두산에 올라 천지(天池)의 맑은 물을 바라볼 때 경험하는 감격과 단군의 자손으로서의 자존감은 말과 글로 형용하기 어렵다. 

나는 옌지시에 체류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옌볜대 도서관에서 보냈다. 이 대학은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배려정책과 조선족 지도자들의 민족 자강(自彊)을 위한 노력으로 1949년 설립됐으며, 중국과 옌볜주의 지도급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등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재학생 수가 2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꽤 크고, 동북아시아의 지리·역사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아 가고 있다. 이 대학의 도서관에는 중국 도서뿐만 아니라 조선족 동포들의 애환이 서린 수많은 문학·문화서적을 비롯해 값진 자료들이 가득하고, 남한은 물론 북한의 서적과 기록물들도 다수 소장돼 있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지만 시간과 능력의 제약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아쉽게 여겨졌다.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다소 답답해지면 교정 산책을 했는데, 잔디밭에서 장구·꽹과리·징·북 등 우리 고유의 민속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풍물놀이 연습에 흠뻑 빠진 남녀 대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학교 내 음악당에서는 가야금 연주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자 도서관이 문을 닫고 대학교 전체가 텅 비었다. 고향 방문, 가족·친지 방문 등의 이유로 대학뿐 아니라 도심마저도 매우 한적해져서 나는 다소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밤중 중천에 덩그러니 뜬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국에 있는 가족·친지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명절엔 조상과 가족·친지에 대한 생각이 더 크게 물씬 떠오른다. 가족·친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은 더욱 절절해진다. 그런데 올해도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는 것 같다. 70년이 넘도록 가족·친지를 못 만나는 이산가족의 아픔이 얼마나 크겠는가. 어쩌면 눈물마저 말라 버렸는지도 모른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간 긴장 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에 조만간 한반도에 화해의 분위기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었다. 그러나 또다시 백일몽에 그치게 될 것인가. 아쉽게도 북미, 남북관계가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언제쯤 돼야 남북의 동포들이, 그리고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이 하나의 겨레로서 함께 추석 명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될까. 그런 날은 정녕 올 것인가? 반드시 오고 말아야 하리라. 

올 추석에는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 고향 방문을 자제하고 옌지 서점에서 사 온 중국 농협법, 노동법 관련 책이나 다시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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