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집에서 초상화를 그려 파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자 실망한 나머지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친구가 묘안을 냅니다.

"아마도 자네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지를 몰라서 그런 것 같아. 그러니 자네와 자네 아내 초상화를 그려서 대문 앞에 걸어놓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당신이 화가인 걸 알 거야."

화가는 친구의 말을 따랐습니다. 나란히 부부가 앉은 초상화를 그린 후 대문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전히 손님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화가의 장인이 그 집에 왔다가 대문에 걸린 그림을 보더니 묻습니다.

"이 여자는 누구지?"

화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니, 장인어른의 따님이지 않습니까?"

장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각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왜 내 딸이 모르는 남자와 같이 앉아 있는가?"

「현자들의 철학 우화」(한상현 저)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화가의 그림 솜씨가 문제일까, 아니면 장인어른이 치매기가 있는 걸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손님들의 그림 보는 수준이 낮은 걸까?’

화가 스스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 그렸을 테니까요. 그러나 세상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더욱더 분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손님들이 몰려올 겁니다.

화가처럼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나의 왜곡된 믿음이나 기대를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숙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세 명의 친구가 있는데, 첫 번째 친구는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못살 것 같은 아주 가까운 친구이고, 두 번째 친구는 그저 무덤덤한 친구이고, 세 번째 친구는 만나도 달갑지 않은 친구라고 합니다. 

평소에 자신이 죄를 많이 지었다고 여기며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입궐하라는 연락이 오자 두려웠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가장 가깝다고 여기던 첫 번째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했더니 단번에 싫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무덤덤한 두 번째 친구는 궁궐 대문 앞까지만 가겠다고 하면서 궁궐 안에는 혼자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실 가장 두려운 일은 궁궐 안에서 벌어질 일일 텐데 말입니다.

할 수 없이 달갑지 않은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며 왕에게 지금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착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세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못살 것 같은 첫 번째 친구는 ‘돈’이나 ‘권력’ 또는 ‘명예’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저 무덤덤하다고 여긴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나 ‘친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기껏해야 장례식장까지 오면 그만입니다. 관 속에 대신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동반합니다.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는 사랑 덩어리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나 해야 할 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만약 화가가 자신이 사랑 덩어리임을 알고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고자 했다면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림 공부에 더욱 매진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그를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서게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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