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식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교수
신진식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교수

무엇이든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최초 타이틀을 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에도 열심히 오르고 남극도 갔다. 관광산업에서도 ‘최초’란 굉장히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무엇이든 최초가 있으면 많이들 찾아가서 보기 마련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개항을 통해 가장 많은 ‘대한민국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도시가 있다. 바로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개항도시 인천이다. 서해와 한강이 만나는 곳에 백제 비류가 ‘최초’로 도읍한 미추홀은 한반도에서 신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당시의 ‘미래첨단도시’였다. 그곳이 현재의 인천 중구 개항지이다. 

1883년 인천은 일본과 청나라, 서구 열강의 물자와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는 ‘개항장’이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에선 신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외교관들의 최초 사교 모임이 열렸던 제물포구락부 건물(유형문화재 제17호), 인천개항박물관(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중구생활사전시관(옛 대불호텔) 등 근대식 건물이 지금도 중구청 앞 개항장 문화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랫길로는 답동성당과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인 내리교회, 한국 최초의 성공회 내동성당 등 국내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시설도 그대로 남아 있다. 

개항장 시절부터 물자를 교류하던 신포시장으로 이어지는 이 일대는 온통 ‘최초’투성이다. 그것도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밀접한 것들이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온갖 최초들을 마주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있다. 1905년 산동회관으로 개업했다가 1912년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해 이름을 바꾼 공화춘에서 최초의 짜장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차이나타운에서 개항장 거리로 내려오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나온다.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도 그들이 대불호텔에 숙박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숙박료는 1원50~2원50전으로 주변 일본 여관의 고급 객실 숙박요금 1원에 비해 훨씬 비쌌다고 한다. 

최초의 철도가 놓인 곳도 인천이다. 제물포와 서울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1899년 9월 18일 완공됐다.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시작한 사업을 일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 진행했다. 최초 운임은 상급좌석 기준 1원50전으로 대불호텔 기본 숙박요금과 같았다. 

차이나타운을 지나 응봉산을 오르면 1888년 조성된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자유공원에 입성할 수 있다. 자유공원에서 내려오면 1895년에 지어진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이 있다. 원래 이름은 협률사였는데 1920년대 애관극장으로 바꿨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1960년 현재 모습인 2층 극장전용관으로 새로 지었다. 지금 매각 위기에 놓여 그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아쉬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 인기 스포츠인 야구와 축구 경기도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야구는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도입됐다는 것이 공식 기록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본인 학생에 의해 인천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최초의 야구 경기가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창영초는 메이저리거 류현진의 모교이기도 하다. 축구는 개항 전인 1882년 8월 영국 군함 플라잉피스호 수병들이 제물포에 상륙해 축구 경기를 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최초의 해외 이민도 인천에서 출발했다.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가 한인 101명을 싣고 제물포항에서 떠났는데, 이들이 공식적인 최초의 해외 이민자들이다. 등대도 팔미도 등대가 최초이고, 1891년에 세워진 타운센드상회가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이며, 담배 공장도 동양연초회사가 최초다. 담배 공장이 있으니 성냥도 필요하다. 성냥 공장도 1886년, 일본 성냥 공장이 들어선 이후로 성냥 공장 하면 곧바로 인천이 연상될 만큼 대부분의 성냥이 인천에서 만들어졌다. ‘인천의 성냥 공장’으로 시작하는 외설스러운 병영가요도 이 때문에 나왔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 없으면 못 마십니다"로 유명한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의 만담이 있다. 왜 인천이고 사이다인가. 최초의 사이다 공장인 인천탄산수제조소가 1905년 신흥동에 생겨난 까닭이다. 생산품은 ‘별표(星印) 사이다’였고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현재 실제 볼 수 있는 건축물도 많지만 없어진 것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박물관 역시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을 비롯해 전신국, 전화국, 기상대 등이 들어와 쇄국하던 조선에 선진 문물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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