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며칠 전만 해도 가을인지 여름인지 모를 정도로 무더웠던 날씨가 갑자기 겨울이라도 된 듯 한파경보까지 내려졌다. 이번 주 토요일이 상강(霜降)이니 이제 정말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가 보다. 이렇게 만추(晩秋)가 되면 지역 축제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건만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올해도 조용히 가을을 보낼 듯하다.

인천광역시는 8개 구와 2개 군으로 이뤄져 있다. 섬으로만 이뤄진 강화군과 옹진군을 제외한 나머지 8개 구는 조선시대에는 부평부과 인천부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부평의 계양산과 인천의 문학산, 이들 산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공동체가 형성됐고 동제(洞祭)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제란 "한 마을의 수호신을 숭상하고 동민들의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동신(洞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라고 「한국민속대사전」(민중서관)에 기술돼 있다.

그러면 원인천을 대표할 수 있는 동제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1997년 10월 9일 동아일보에는 ‘安官 선생을 인천의 정신적 지주로’를 제목으로 ‘길놀이 축제 14일 문학산성서, 안관당제 재현-고인 넋 기려’를 소제목으로 해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를 지냈던 안관 김민선(安官 金敏善, 1542∼1593)선생을 인천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길놀이축제가 인천시민의 날 전야인 14일 열린다"는 기사가 있다. 하지만 이후 안당관제가 열린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허물어진 사당이 문학산 꼭대기 어렴풋이 가리고(殘祠掩映鶴山전), 영첩과 신관의 비단 장막 이어져 있네(靈妾神官繡만聯). 갯가의 어부는 두터운 복을 빌려고(沼海漁人祈厚福), 봄이 오면 큰 생선 놓고 신굿하네(春來先薦尺魚全)."

이 작품은 조선후기 이규상이 지은 ‘속인주요’이다. 첫 연에 문학산 꼭대기 허물어진 사당이 나온다. 이는 문학산성에서 임진년 난리를 사민들과 함께 이겨 내고, 그곳에서 병을 얻어 순사한 인천부사 김민선에 대한 기억과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안관당(安官堂)’인 듯하다. 이후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인천부사 구완식이 문학산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4월 20일)에 기록돼 있다. 

안관당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마을의 안녕과 번영, 그리고 풍요를 담당하고 마을주민의 지역적 단합과 화목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확대, 변모했다.

이용범은 ‘원인천 지역 지방제사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글에서 "제사의 범위나 영향력이 한 마을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나 지방관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고 관련된 제사"로 그 성격을 규정하며 "한 지역의 지방제사는 기본적으로 그 지방의 관과 민의 참여가 수반된다. 그 제사가 관과 민이 공유하고 관민이 동참한 제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한 지방제사는 종교적 제사로서만이 아니라 그 지방의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로서 기능한다"고 했다. 

인천의 원로 학자 최원식 선생님의 ‘안관당제를 복원하자’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인천이 임진왜란 때 승전지의 하나라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것인데, 김민선 부사의 승리는 왜 가능했을까? 그의 부대가 관군이 아니라 토민으로 중심을 삼았다는 점을 유의하면 김민선 부사의 승리는 인천 출신 지도자 아래 결속한 인천 민중이 쟁취한 값진 성과였던 것이다. (중략) 해방 후 오히려 안관당제가 끊어졌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기지 안의 안관당 유구를 정밀히 조사하고 문학고로들의 증언을 들어 안관당을 복원하자. 그리하여 안관당제로부터 인천 축제가 시작될 때 그것은 흩어진 인천시민을 하나로 묶는 지역적 통합과 연대의 잔치 마당으로 흥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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