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한국 정치의 본질은 투쟁이며 대화와 타협, 성찰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후배 정치부 기자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실감되고 있다. 요즘 같은 난장판 대통령선거를 보면서 말이다. 여야 유력 주자와 연관된 대형 스캔들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고, 서로 상대방을 향해 "내가 당선된다면 너는 감옥행", "봉고파직, 위리안치하겠다"는 살벌한 위협이 도를 더했다. 답답한 건 앞으로 5개월 동안 스캔들이 진상 규명되지 못하고 이대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아수라장이 된 까닭이 뭘까? 전문가들은 선거의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한다. 여권의 제1주자가 적합도에서 여론조사 1위를 달리지만 정권 재창출보다는 정권 교체의 열망이 훨씬 높게 나오는 등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여론지형이 여야의 극한 대결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후보로 나선 모든 이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자답해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자신 있게 국민들 앞에서 표를 달라고 할 만큼 양심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촛불정부를 자처하는 여권이 오만과 독선, 위선과 내로남불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기사회생한 야권은 게으르고 시대착오적이며 허위의식에 젖을 대로 젖어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항변할 수 있는가 말이다. 결국 국민 앞에서 믿음직한 공약과 멋있는 선거 구호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여야가 차악(次惡)을 자처했기에 이런 선거판이 벌어졌다는 걸. ‘이쪽보다는 저쪽이 더 나쁘다’는 차악 경쟁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도 묻고 싶다.

드라마 ‘D.P’에서 가혹행위를 일삼아 온 황장수가 전역 후 자신을 납치해 총을 겨누면서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피해자에게 겁에 질려 내뱉은 대사가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였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관행이라는 핑곗거리에 기대는 습성이 온갖 비리와 폭력과 악순환의 병폐를 낳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따라서 이걸 깨부수려면 일차적인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고 반성할 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다. 정치는 물론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 있는 못된 문화 유전자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신 안에 깃든 모순과 취약함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고백에서 스타트해 성찰로 질주하는 것뿐인 걸 정치인들이 모를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동북아시아 역사의 긴 흐름에서 민중들은 ‘성군(聖君) 도래!’의 기대와 열망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5년마다 ‘멋있고 훌륭한 나랏님’을 갈망하는 버릇은 이제 소망을 넘어 기도하는 절절함으로 바뀐 지 꽤 됐다. 덜 나쁜 자신을 찍으라는 지금의 선거판은 한마디로 집어치워야 한다. 여권이니 야권이니 하면서 강경 지지층을 모아 호들갑 떨지 않기를 바란다.

우선 여야 모두 선거에 임하는 자세부터 바꿔라. 오늘의 대한민국 현안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지 소상히 밝혀라. 그걸 두고 토론하는 모습을 진정 기대한다. ‘왕(王)’을 손바닥에 써서 뭘 기대할 것이며 ‘대장동 의혹’, ‘고발 사주 의혹’을 내세워 "저런 세력을 찍으려고 하느냐"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강요하는 작태부터 깨끗이 뒤로 미뤄라. 국민적 기대가 ‘투표하지 않을 권리’를 찾는 상황으로 바뀌게 하지 말라는 당부다.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명제는 지금 현실로 떠올랐다. 처음에 보수적 자유부르주아 세력에게 노동자·농민·영세 자영업자·성소수자들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독자 정당과 선거 전략으로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출발했으나 오늘날에는 왜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상황이 됐다. 정의당·녹색당·사회변혁당·노동당·진보당·기본소득당·미래당 등이 아직 영향력은 미흡할지 모르나 그들의 주장에는 공감할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희망 없는 ‘기존 체제’를 여기서 끝내지 못하고 대통령 당선인에게 그때 왜 그랬느냐고 다그칠 때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를 다시 들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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