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경기도박물관에서 ‘경기, 마한·백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경기도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마한~백제 초기에 이르는 유물들을 전시한다. 경기지역은 선사시대 유물도 많이 발견된 곳이다. 한반도 지역 원시 부족 생활의 태동지이면서 삼한시대 부족 생활의 본보기 지역이기에 선사시대 유물들은 빠져 있어 아쉬움이 있다.

원시 부족들이 생활하면서 인류학적으로 가장 위대한 발명은 발화법이라고 한다. 한반도 지역 원시 부족들은 나무를 마찰시켜 불씨를 얻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돌을 마찰시켜 불씨를 얻는 화타석 방법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은 보온용, 방어용, 취사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옷이라고는 동물 가죽으로 신체 주요 부분을 가리는 수준이어서 겨울철 보온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호랑이 등 맹수들이 많았던 한반도 지역 원시 부족들은 불을 방어용으로도 사용했다. 주거지역인 동굴 속 또는 움막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불을 설치해 놓았다.

불의 발명으로 식물을 조리해 섭취함으로써 체력적으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원시 부족 생활에서 망치, 도끼, 칼, 창, 화살촉, 침들은 생활도구이자 무기로도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용구로 바다, 산, 계곡, 냇가 주변의 생활 터전에서 식량을 사냥하고 채취해 가면서 부족 생활을 이어온 것이다. 곡물도 재배했을 것이다. 갈대와 나무들을 섬유질로 만들어 그물망을 만들고 관목가지와 덩굴로는 선박을 제작해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토기 종류도 다양한 문양을 넣어 만들어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청색, 붉은색, 흑갈색의 항아리, 그릇, 시루 등 빗살무늬토기들이 대부분의 경기지역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패총, 지석묘, 청동기 유적, 유물들도 경기지역에서 많이 발견됐다.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석기류는 하늘에서 내렸다는 천강설 주장이 있었다. 주자학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이 이학에 있다는 근거로 천강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때 나왔다고 한다. 석기류는 기(힘)의 응결물이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이륙이다. 그의 저서 「청파극담」에 나온다. 

1897년 일본인이 발견한 선사시대 돌비녀는 미국 언론에 공개된 적도 있었다. 선사시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수준 높은 생활방식이 있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

마한시대 유물들도 전시되고 있다. 마한 지역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인데 그 중심지는 서울, 인천, 경기지역이었다. 마한은 54개 부족으로 이뤄졌다. 백제가 큰 부족이었는데, 부여족의 후손인 백제 부족이 마한을 통일시켰다.

마한 각 부족들의 통치자 명칭은 신지, 읍차, 험측, 번예, 살해였다. 마한은 백제 부족이 중심이 됐다. 진한과 변한은 동맹국으로 발전하고, 마한은 독립적으로 부족 간 분열 없이 백제 건국의 디딤돌이 됐다. 마한인들은 초가 지붕에 흙으로 지은 집에서 생활했다. 곡물도 재배하고, 잠업으로 면직물을 생산하고, 목축도 길렀다.

화폐도 있었다. 철편으로 제작해 통용됐다고 한다. 당시에도 상품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마한은 서해안 인천 바닷길을 이용해 섬과 섬을 순례하며 상품을 판매하고 물물교환도 있었다

선박 제작 수준이 높았던 마한은 서해안에서의 경제활동이 활발했다. 마한인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 보인 것은 금과 은 등 보석류들도 평범한 장식품이었다는 것이다. 방직 기술도 뛰어나 마한인들은 금과 은으로 옷감에 문양과 수놓는 솜씨가 뛰어났다. 마한인들은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마, 모시, 갈포의 직물로 두루마기를 만든다는 기록이 중국 고서에 있다고 한다.

마한인들은 축성 기술도 좋았다. 선사시대 유물들이 나온 하남 위례성, 중평산성, 아단성은 마한의 유적이고 명칭이다. 청동기~마한~백제 초기의 생활용품과 무기류의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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