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칼럼니스트
김호림 칼럼니스트

길이란 무엇인가? 길은 바깥 세계로 나가는 통로이고, 만남을 이어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채널이 된다. 또한 추상적으로는 생활 양식(Modus Vivendi), 운영방식(Modus Operandi)이기도 하다. 이 뿐 아니라 길(道)은 진리와 깨달음 자체이자 깨달음을 위한 구도자의 길이기도 하며, 편한 길인 왕도(Royal Road)나 지름길(Short Cut), 첩경(Short Way)이나 돌아가는 길(Detour)이 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많은 길을 만들었다. 길은 인간의 역사이고 문명이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점령지에 먼저 도로부터 닦았다. 그 길은 대체로 군대의 이동통로와 상품이 교환되는 교역로 역할을 했으며, 이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주요 길목에 군을 주둔시켰다. 무릇 명실상부한 패권국이 되려면 바닷길, 하늘길, 육로를 포함한 모든 길과 길목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길 위에서도 사람들은 길을 묻는다. 왜 그럴까?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의 좁은 길’도 있고 ‘천산 북로의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와 같은 험난한 길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각기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찾기 위해 그 행로(行路)를 묻는 것이다. 그 길에 동행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그와 목적지가 같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앞에는 가야 할 많은 길이 놓여 있다. 제한된 시간에 그 길을 모두 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와 같이 항상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들이 우리에게 있게 마련이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택한 길이 옳고 바른 행로인지 아니면 택하지 않은 길이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 느리게 천천히 걸어가야 할 아름다운 길이 있다. 이를테면 버드나무 가로수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신작로는 한때 도시를 동경하는 시골 어린이들의 꿈이었다. 그 신작로를 통하는 길은 골목길이다. 으레 시골 골목길은 구불구불하다. 기와로 이은 담이나 흙담들 사이로 난 길은 굳이 직선으로 고쳐 시골 사람들을 성급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느리게 다니며 이웃집 담 넘어 기웃거리는 여유가 이웃과의 정을 두텁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느리고 아늑하며 정겨운 길을 무슨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동네 골목길을 직선으로 고치라는 행정명령을 관청이 내린 때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산과 들과 연못을 느리게 돌아가는 아름다운 신작로를 버려 둔 채 산과 논을 뚫고 메워 직선으로 새 길을 내겠다는 지방자치단체의 한심한 발상이 부지기수이다. 통계수치를 보면 이 나라는 전국고속도로, 고속화도로, 지방도로를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길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지방을 차로 여행하면 차량이 한산한 고속화도로와 지방도로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길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예산 낭비와 산과 숲과 농지를 자르고 메꾸는 환경 파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빠른 길과 운송수단이 등장할수록 대도시 집중화 현상이 일어나 시골은 오히려 황폐화되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이 나라가 이제 길의 미학도 고려해 볼 때가 됐으나, 아직도 길의 기능을 단순히 신속하게 통과해야 할 편리한 도구라고만 생각하는 모양이 안타깝다.

더욱이 문제는 물리적인 길인 도로뿐이 아니다. 정신과 의식의 세계인 전통적 생활양식은 낡은 것으로 쉽게 폄하되고, 국가와 사회의 운영방식마저도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 개혁의 대상이 돼 획일적으로 폐기해 버린다. 오로지 정치적 이유로 그들은 쉽고 편한 길인 왕도나 지름길, 첩경을 쫓아갈 뿐이다. 

따라서 안내자는 때로 조금 늦더라도 공동체 모두가 함께 가기 위해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 느리지만 아름다운 길로 동행자와 함께 걸어가야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