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수 동산중학교 교장
황규수 동산중학교 교장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가을에는 축제가 열린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이 되면 학교에서도 그간 배우고 익힌 바를 바탕으로 전시나 공연 등 발표회가 마련된다. 그러면서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며 기쁨을 나눈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해 발생 초기에는 그것이 전면 중지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는가 하면 현실 상황에 맞게 변경돼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1999년 10월 30일 인천에서는 시내 10여 개 고등학교에서 가을 축제가 있었고, 그 후 많은 청소년들이 상가건물에서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불이 나 그 안에 있던 중고생들을 포함한 57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현동에 위치한 4층 상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건물 2층 생맥줏집과 3층 당구장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많은 손님이 숨졌던 것이다. 

가을 축제가 끝난 후에 뒤풀이하던 많은 청소년들이 있지도 않은 비상구와 비상계단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유독가스에 질식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불은 35분 만에 진화됐지만 많은 학생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라는 제목으로 사전에 기록돼 있는 이 사건은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공무원의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로 파악되고 있다. 

이로 인해 21세기 창의적인 인재 육성을 위한 건전한 놀이문화 공간 창출을 목표로 2004년 10월 인천시 중구 인현동 옛 인천축현초등학교 자리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개관했고, 그 뒤편에는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래서 거기에는 "일천구백구십구년 시월 삼십일 인현동 화재로 희생된 오십칠 명의 넋을 위로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우리 모두 함께 듣는다’라는 제목으로 조우성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도 / 축현리 언덕빼기에는 / 해가 뜨고 / 바람이 불고 / 나뭇잎들은 저마다 / 반짝이며 노랠 하는데 // 아들아, 딸들아 / 너희는 어디 갔느냐 / 이제나저제나 / 불현듯 문 앞에 들어설 듯한 / 그 싱그러운 웃음 / 그 풋풋한 젊음 // 가슴에 지우지 못하고 / 삼백예순 날 / 너희 안부 / 물어볼밖에 없는 / 못난 아비 못난 어미를 // 오오, 용서해 다오 / 전생에서 내생으로 맺어진 / 아름다운 인연 / 오롯이 챙기지 못한 // 세상의 허황한 꿈을, / 너희에게 용서받지 않고는 / 편히 잠들 자 없는 이 세상을, / 모두 모두 용서해 다오 // 이제는 결코 // 참척(慘慽)의 슬픔 없는 / 세상으로 가꿀 것이니 // 아들아, 딸들아, /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 너희들의 나라 // 그 먼먼 꽃밭에 / 오늘은 해가 뜨고 / 바람이 불고 / 나뭇잎처럼 반짝이는 / 너희 노래 소리를 / 우리 모두모두 함께 듣는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난 2020년 가을, 홍예門문화연구소와 인현동화재참사20주기추모위원회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건물 앞에 ‘기억의 싹’이라는 화재 참사 공적기억조형물을 세웠다. 그리고 조성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현동 화재 참사(1999.10.30)를 계기로 건립된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의 아픔을 나누며 생명 존엄과 공공의 기억을 미래 세대와 함께 하고자 인천시민의 마음을 모아 기억의 싹을 세웁니다." 

한편, 인천시는 올해 4월 19일 ‘인현동 화재 기억사업’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시는 착수보고회를 시작으로 4월 유족 및 부상자, 목격자, 청소년 그룹별로 인터뷰 대상자를 모집하고 5월부터 구술 및 영상기록을 청년세대 연구자를 중심으로 진행해 오는 12월 책자와 영상을 통한 기록물을 발간할 예정이다. 인현동 화재사건이 호프집 화재로 축소되고 왜곡된 기억을 재조명함으로써 지역구성원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픈 기억을 유족에게 전가하지 않고 함께 공적기억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사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 사업 시작이 다소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며, 이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 위로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기록으로 보존함으로써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그것이 한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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