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이영태 섬마을선생님연구회 운영위원

포경(捕鯨, 고래잡이)은 수렵 활동이었다.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나듯 소형어선을 타고 고래를 잡는 일은 원시시대의 일상적인 어로 활동이었다.

 근대의 포경업은 자원 확보와 관련이 있다. 고래 기름이 밤을 밝히는 등유(燈油)로, 그것의 수염은 생활용품으로 가공됐다. 17~19세기 네덜란드·영국·미국 등 포경선이 북극해와 태평양에서 향유고래·참고래·귀신고래 등을 남획했고, 19세기 말 러시아와 일본도 포경업에 가세했다.

 우리나라 포경업은 제국주의 침탈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899년 대한제국을 강압해 포경특허 계약을 따낸 러시아는 장생포 등지를 어업기지 삼아 동해에서 대규모 포경사업을 전개했다. 1900년 일본도 포경특허를 받아 러시아와 경쟁하다가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러시아의 포경업을 금지시키고 1945년 해방 때까지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독점했다.

 1909년 일본은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울산(蔚山)·장전(長箭)·대흑산도(大黑山島)·거제도(巨濟島) 등에 사업장을 열었다. 1918년에는 대청도(大靑島), 1926년 제주도(濟州島)로 확장했다. 대청도는 1930년대 초까지 포경업이 활발했던 곳이었다. 

 대청도의 경우, 대왕고래의 3두수는 당해 연도 전국 총 포획수이며 긴수염고래는 총 포획의 40%에 해당한다. 1931년에도 대왕고래 3두수를 포획했는데 이것이 해당 고래의 전국 총 포획수였다( 농업통계표 1926~1935년).

 그러나 대청도 포경업은 1934년부터 급속하게 쇠퇴했다. 고래 어획량과 수요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결국 포경업 기지를 대청도에서 대흑산도로 옮겼다. 일제강점기 포경업은 일본의 독점적인 산업이었다. 그들은 동해와 서해, 남해 바다를 가리지 않고 남획해 마침내 서해에서는 고래를 보기 힘든 상황으로 만들었다. 가끔 어민들의 그물에 걸린 고래가 올라오는 경우, 언론에서 희한한 사건으로 보도할 정도로 연근해의 고래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부터인지, 고래는 내면의 희망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러(「고래사냥」, 송창식, 1975)

 

 송창식 작곡, 최인호 작사의 이 노래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의 OST 중 한 곡이었다. 하길종이 감독하고 최인호 소설가가 극본을 쓴 이 영화는 군입대를 앞둔 청춘들의 방황과 좌절을 소재로 했지만, 실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을 반항적 독법으로 그려낸 영화였다. 고래사냥에서 ‘고래’는 청춘들의 이상과 꿈을, ‘사냥’은 꿈을 좇는 여정을 가리키고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영화의 OST로 등장했던 ‘왜 불러’가 단속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들의 도주 장면에 삽입된 것을 문제 삼던 공연윤리위원회는 ‘고래’의 의미를 추궁하다가 ‘왜 불러’와 함께 ‘고래사냥’을 금지곡으로 묶었다. 그러자 청춘들에게 ‘고래사냥’은 시도 때도 없이 불리는 애창곡이 됐다. 대학가 인근 술집에서, 엠티(MT) 장소에서, 때로는 시위 현장에서까지 ‘고래사냥’이 터져 나왔다.

 고래와 대청도의 친연성을 살피면서, 이참에 각자 스스로 고래의 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도 지역학과 인문학의 교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