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시인
이태희 시인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화가’라는 별칭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박수근 화백의 전시회여서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녀왔다. 

전시 구성은 박수근 화백이 화가를 꿈꿨던 소년 시절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전까지의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구성해 놓았다. 제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전시실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보고 감동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10대 시절의 수채화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유화 등을, 제2부 ‘미군과 전람회’ 전시실에는 생계를 위해 미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한 사연과 함께 ‘나무와 두 여인’ 등의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창신동 사람들’ 전시실에는 종로구 창신동을 중심으로 가족과 이웃들, 소박한 거리 풍경을 담은 작품이, 제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실에는 박수근 화백이 추구하고 완성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박수근 화백의 평생 주제였던 ‘나무와 여인’이 어떻게 변주돼 가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1전시실에서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봄이 오다’라는 작품을 봤다. 18세 소년 시절의 이 작품에서부터 나무와 여인이 등장하고 있다. 화폭의 전면에 기와집이 자리잡고 있고 지붕 너머로 잎이 다 떨어진 빈 가지의 나무가 솟아 있다. 기와집 앞에는 빨래를 너는 여인과 마루에 앉아서 일하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지붕 위로 솟아오른 나무는 잎은 다 떨어졌으나, 아니 잎을 달고 있지 않아 오히려 강렬한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널리 알려진 ‘나무와 두 여인’이 조명을 받고 있었다. 이 작품은 함께 미군 PX에서 근무했던 훗날의 작가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기도 했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나목」의 작중 인물 이경이 화가 옥희도의 작품을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보게 된 것은 빛나는 성찰이고,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는 언술은 박수근에 대한 박완서의 헌사에 해당한다. 

전시 순서에 따라 박수근 화백의 여러 ‘나무와 여인들’을 살펴보던 나는 제4전시실에 이르러 홀연히 마음이 따뜻해지는 두 작품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고목(古木)’이라는 제목의 1961년 작품이고, 또 하나는 ‘나무와 여인’이라는 1964년 작품이었다. 

‘고목(古木)’은 말 그대로 죽은 고목(枯木)이 아니라 오래된 나무였고 벌거벗은 ‘나목(裸木)’도 아니었다. 봄날 꽃을 피우기 시작한 나무였다. 비록 일부가 베어지고 옆으로 굽은 나무였지만 찬란한 꽃망울들을 달고 있었다. 박수근 화백의 생애를 떠올리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작품이었다. 

1964년 ‘나무와 여인’ 속 나무 역시 여기저기 툭툭 가지가 잘린 나무라서 과거의 강렬한 이미지는 없었다. 그러나 남은 가지에 푸른 잎들이 흐뭇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 나무 아래 서 있는 두 여인도 예전의 바삐 지나가거나 아이를 업고 서성대는 모습이 아니라, 나이 든 여인과 젊은 여인, 어쩌면 모녀 같기도 한 두 여인이 마주 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필자가 두 작품 앞에서 받은 뜨거운 감동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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