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가평군 관광전문위원
이상용 가평군 관광전문위원

지금은 흔적이 모호하지만, 가평군 대성리 구운천변 만곡정사(晩谷精舍)에 대한 기록이 ‘가평역사의 편린’이라는 문헌에 남아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만곡정사의 위치는 북한강 지류인 대성리 구운천 하류 부근으로 추정된다. 만곡정사는 광해군이 통치하던 1613년, 영창대군 옹립 사건(계축옥사) 때 영흥부사 최기남이 무고 파직을 당한 후 가평 북한강변으로 유배를 와서 세웠으며, 후학들의 학문터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최기남의 아들 최명길은 29세 때 병조좌랑이라는 벼슬에서 파직, 유배를 당해 대성리 만곡정사에서 약 10년 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정신적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독서에만 집중했고, 주역을 천 번 이상 읽고 난 후 양명학의 기초를 정리했다. 그런 후 인간관계와 시대적 흐름을 헤아리는 지혜를 터득했고, 세상만사 길흉의 수를 읽는 경지에 오르게 됐다. 조용하게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며 실사구시의 혜안을 익히고 자신의 호를 지천이라고 지었다. 북한강처럼 ‘느리게 흐르는 냇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학문 통달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던 최명길은 야인생활 10여 년 만에 인조반정의 주역이 돼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고, 이후로는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그렇지만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척화파인 김상헌의 대척점에서 청과 화친을 주장하다가 역사의 배신자, 나라의 역적으로 몰렸다.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빌붙은 간신배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혈혈단신 청나라 황제와 담판을 해 나라와 임금을 구했다. 시대를 앞서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응하는 외교 성과를 발휘한 그의 화친론(주화론)은 훗날 외교학문적 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 

1637년 1월 18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한 달 만에 병사들이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렸다. 남한산성의 함락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예조판서 김상헌은 "임금도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며 큰소리만 쳤다. 그러나 이조판서 최명길은 "조선 임금으로서 명분보다는 백성의 운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아있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임금을 설득했다. 

이렇게 ‘무데뽀’ 척화론과 ‘평화적’ 화친론의 대립 속에 최명길은 청나라 황제에게 보낼 화친문서 초안을 작성해 임금과 신료들이 모여 있는 조정에서 읽기 시작했다. "조선 국왕은 절을 하고 대청국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최명길이 읽기 시작하자 김상헌이 문서를 빼앗아 찢어 버렸다. 조정 마룻바닥에 흐트러지는 종잇조각들을 주워 하나씩 풀로 붙이던 최명길은 그만 통곡하고 말았다. 힘없는 약소국의 설움이 눈물 속에 그대로 투영됐다. 

임금을 앞에 두고 신하들은 양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가운데, 청군은 남한산성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쑥대밭을 만들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했을 때 그는 홀로 목숨을 담보하고 말을 달려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 칸에게 외쳤다. "황제폐하! 공격을 멈추시오. 조선의 국왕이 화친을 청하고 있소!" 청의 황제와 화친을 맺고 나서 조선의 임금은 송파 삼전포에서 ‘3배 9고두’를 하게 됐다. 말이 좋아 화친이지, 명색이 한 나라의 임금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대고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친의 대가는 참혹했다. 수십만 포로들이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 최명길은 임금과 백성의 목숨을 보전했지만 자신의 이름은 역사 속에 더럽혀졌고, 항복한 나라의 백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역사는 수백 년이 흐르고 나서야 최명길을 사면하고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구한 충신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맨손으로 맞서 싸웠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대성리 만곡정사에서 10여 년 세월 인내하며 익힌 양명학,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혜안과 길흉을 예측하는 최명길의 외교적 수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어떤 나라가 돼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시대의 인물이 깊은 학문을 연마했던 관광명소, 대성리 구운천변 만곡정사를 되살리는 역사문화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평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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