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197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왜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지미 카터(대통령에 당선됐다)는 맨앞에 두 가지를 내세웠다. "나는 법률가가 아닙니다. 나는 워싱턴 정가(政街) 출신이 아닙니다."

카터의 출마 변에서 ‘법률가가 아니다’라는 이유는 당시로서 충분한 배경이 있었다. 앞서 워터게이트라는 사건이 발생해 미국 전체가 떠들썩할 때 백악관 회의에서 법률가 출신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아니라고 버텨.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우리 계획을 탈 없이 지키려면 뭐가 됐든 감춰!"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육성은 법에 정통한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할 망언 그것이었다. 

기득권을 손에 쥔 사회 최상층의 심각한 일탈행위를 법률가들이 주도하거나 조력했다. 미국의 법조계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보다 일반 대중의 허탈감과 분노는 가히 메가톤급이었고, 법조윤리에 대한 각성과 필요성이 특별히 강조됐으나 2001년 터져 나온 대형 비리사건에서 변호사들이 한몫 단단히 한 사건은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법률직 공직자들의 윤리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친 건 당연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내년에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후보가 모두 법률가 출신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과연 그들이 법조윤리 면에서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기도 하려니와 지나간 역사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역사의식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거창하게 68혁명의 톨레랑스 정신을 구현했던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혹한의 추위 속에서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었던 빌리 브란드 전 서독 총리, 퇴임을 앞두고 홀로코스트에 헌화한 메르켈 독일 총리 같은 사례를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현대사의 질곡에 담긴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액자에 걸어 두고 있는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는지. 역사의식 부재의 심각성은 우리 공동체가 오랜 시간 어렵사리 합의한 기본 가치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통상 한 사회의 기본 가치를 되돌리는 시도는 주변부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폭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폭민을 막으려면 중심부 집단이 이 같은 시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야 마땅하다. 중심부 책임론이다. 중심부 집단이 기본 가치를 되돌리려는 시도에 대해 경고하느냐, 아니면 부화뇌동하듯 고무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미래가 180도 달라진다는 건 수많은 석학들이 이미 제시한 바다. 책임지지 않는 그들이 계속 책임자의 위치에서 중심부 역할을 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실험실일 뿐이다.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잔혹한 실험실인 것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는 사회, 그곳의 시민은 자신의 삶 자체가 실험이 되게 할 뿐이다. 

당선인이 나오면 선거 과정의 모든 게 끝난다. 어제의 뉴스가 오늘의 신문 지면이나 TV 화면에서 사라지듯 없어진다. 사라진 뉴스는 죽은 것, 하지만 죽지 않게 해야 하는 시민의 역할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살아나는 건 뉴스가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삶이다. 지금 대선의 열풍이 서서히 분다. 대장동이 어떻고, 고발 사주가 어떻고, 심지어는 "군사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탄압만 빼면 전두환이 정치를 잘했다"는 해괴망측한 얘기까지 나온다. 지지층 결집을 위한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역사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리더의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주둔군 이론’이 있다. 인생의 험난한 과정을 헤쳐 가다 보면 상처가 생긴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행복했던 시절보다 더 어렵고 고단했던 시절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많은 희생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이란 전장도 힘들수록 많은 주둔군을 남긴다. 광주만이 아니라 전국 도처에 지금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주둔군의 목소리가 드높다. 역사의 법정에 공소시효는 없다. 책임을 끈질기게 묻는 시민들의 가슴과 눈빛이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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