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오늘부터 열흘 전인 11월 9일은 소방의날이었다. 대개의 기념일이 역사적 사건에 유래를 두는 것과 달리 소방의날은 화재신고 전화번호 119에서 비롯된다. 이날이 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20년 전인 1991년이다. 당초에는 11월 1일이었다. 정부 수립 후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일에 화재 예방캠페인, 소방유공자 표창과 같은 행사를 벌여 오다가 1963년부터 정식 기념일이 됐고, 1991년 이를 바꾼 것이다.

재난 대비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갖춰야 할 기본 인프라이다. 그렇다면 인천이 근대도시로 자리를 잡아가던 때 화재에는 어떻게 대비했을까. 일본은 많은 화재사건을 겪으면서 만들어 온 화재 예방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초창기 인천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인천 일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소방대를 설치·운영했다. 그러나 화재는 늘 사소한 부주의로 일어났다. 화재로 재산과 인명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가장 큰 화재는 1907년 3월 5일 신포동에서 일어난 불로, 400여 채의 집이 불에 탄 사건이었다. 이를 두고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은 비싼 금액으로 소방기계를 사 왔으나, 어제 탁포 일본인 가옥이 소실되었다. 소방기계를 써도 참사를 막을 수 없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운명을 바꿀 수 없구나"라고 한탄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를 계기로 인천이사청은 소방서를 늘리고 비상용 저수조를 설치하는 등 화재 피해를 줄이기 위해 힘썼다.

그 무렵 우리도 인천감리서를 중심으로 소방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추정할 만한 기사가 황성신문에 실려 있다. 1908년 12월 9일자 기사에서 "인천항 내에서는 종종 화재가 일어나 재산과 인명피해를 일으키므로 인천감리서 경찰서에서는 화재 예방을 위해 소방대원 10여 명과 순사 10여 명이 인천항 내 각처를 밤에 순찰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소방서를 설치하고 소방장비를 비치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소방서 설치와 소방장비 구입에 필요한 비용 가운데 상당액은 기부금으로 충당하던 시절이라 일본인이 기부한 돈은 일본인 마을 소방시설 확충에 쓰였다. 인천경찰서는 1910년 관동과 신생동에 각각 소방파견소를 설치했으나 면적이 훨씬 넓은 조선인 마을에는 1913년이 돼서야 경동에 하나만 설치했다. 이후에도 홍예문 앞에 전동 소방서를 설치하고, 신생동 소방서 청사를 새로 짓는 등 지속적으로 재정을 투입하지만, 조선인 마을은 화재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었다. 기차에서 떨어진 불씨가 초가지붕으로 옮겨붙어 큰 불로 번지는 화재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배가 드나드는 인천항에서는 부두와 선박 화재도 자주 일어났다. 1929년 9월 인천세관 구내 연안무역지대에서 일어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신생동과 전동 소방서에서 출발한 소방차가 공교롭게도 지금의 국민은행 신포동 출장소 사거리에서 충돌해 소방차 두 대가 대파되는 일도 있었다. 1936년 1월 인천기선 소속 선박에서 불이 일어났고, 1939년 1월에는 중유를 싣고 군산을 거쳐 요코하마로 떠나려던 오사카 상선 소속 선박에서 불이 일어나 선박이 불덩이가 됐다.

당시 소방서는 경찰서가 관할하던 때로, 경찰서에 소속 소방서를 두고 그 아래에 소방파출소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관동 소방서는 홍예문 앞 소방서가 설치되면서 없어진 듯하다. 신생동 소방서의 규모가 가장 컸다. 한동안 전동 소방서와 신생동 소방서 두 개로 운영되던 인천의 소방체제는 도원동에 소방서가 생기면서 3개로 늘어난다. 이후 1940년 무렵 인천소방의 중심이 도원동 소방서로 옮겨지면서 전동 소방서와 신생동 소방서는 소방파출소로 바뀐다. 1919년 세워진 전동 소방파출소는 오늘날까지 한자리에서 100년 넘게 여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 앞에 기념비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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