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역경 속에서 피는 꽃은 더 아름답다. 꽃에게 겨울 추위는 역경이라 할 수 있다. 동백꽃처럼 겨울이 제격인 품종도 있지만 온대성 화훼가 추위를 극복하고 초겨울에까지 꽃을 피울 때는 그 숭고미가 남다르다. 요즘 ‘집콕, 방콕’ 생활로 늘어진 심신에 생기를 불어넣는 꽃이 있어 살펴본다. 

비록 솔긴 하나 우리집 발코니는 온통 이들이 일군 오케스트라 꽃밭이다. 새벽별들처럼 연주들로 반짝인다. 연녹색 긴 꽃대궁을 미끈히 뽑아 올린 정수리마다 하늘을 우러러 뾰족이 내미는 박홍빛 꽃봉들이 돌올하다. 미리 핀 여러 송이 꽃들은 초겨울 추위도 아랑곳 않는 듯 홍·백의 세로 줄무늬를 띤 채 연분홍 꽃잎들로 어우러져 한창이다. 십수 년간 집 환경에 적응해 토종화된 것 같다. 멕시코나 남미 원산인 아마릴리스 화초다. 일경다화(一莖多花), 한 대궁에 보통 2~4개의 꽃이 피는데, 올해는 1경5화의 꽃들이 연이어 피고 있다. 어른 손만 한 꽃송이라 숫제 열린다고 해도 될 성싶다. 한 열흘은 너끈히 견딘다. 트럼펫 모양의 각 꽃송이가 우산살 모양으로 하나씩 피는 꽃차례야말로 장관이다. 지난 8월부터 여태까지 피고 지니 그 강인한 생명력이랄까, 추위가 닥쳐도 쉬이 포기하지 않는 개화의 지속성이 대견스럽다. 새 생명 산고의 위대성을 본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보다 뭐 못할 게 없다. 비록 인간들과 언어로 소통할 수는 없지만 되레 우리를 위무하는 것 같다. 

"가을비 들은 뒤에 구름 속에 달이 뜰 때/ 남몰래 창틈으로 사리살짝 쳐다보니/ 꽃무늬 아마릴리스 막 벙그는 그 찰나∥달맞이꽃 노란 빛만 달빛인 줄 알았는데/ 발코니 한켠에서 요동치는 저 몸짓은/ 줄무늬 연홍빛으로 피워내는 속정이라∥하늘과 땅 사이에 사랑이란 웬 말인가/ 모르는 소리 마라 둘이 서로 속삭임을/ 우주가 깨지는 소리 시방 잠깐 들었네." 내 졸음 창작품 ‘아마릴리스의 달’ 전문이다. 가을비 멎은 달밤, 그리스신화의 양치기 소년·소녀가 맺은 순정한 사랑은 아직도 이 꽃에 담겨 있다. 그 사랑의 온기가 초겨울 추위마저 녹여 버린다. 누가 이의 꽃말을 ‘오만과 허영’이라 했는가. 저 1930년대 꽃의 역저 「화하만필」을 쓴 호암 문일평이 당시 이 꽃을 봤다면 마땅히 ‘희망과 생명’이라 했으리라.

어제오늘 좀 풀려지던 우리 일상생활이 다시 위축되는 느낌이다. 아프리카발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이 지구촌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전염력이 델타 변이보다 세다고 한다. 2년여 동안 진행된 코로나로 인해 우리에게는 비대면 사회로의 인식 전환이 정착되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고 변이를 거듭하면서 계속 살아남을지 모른다. 이런 오미크론은 맨눈으로 뵈지도 않아 미미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미물의 감염에 맥을 못 추는 우리 인간사회가 아마릴리스 꽃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꽃은 오미크론에도 불구하고 더 화려하게 개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울뿐인 인간의 오만한 나약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오만과 허영은 우리 인간에게, 희망과 생명은 이 꽃에게 붙이는 것이 어울린다.

지난 11월 국제금융협회(IIF)는 한국의 가계부채가 올 2분기 기준 GDP 대비 104.2%로서 주요 37개국 중 가장 높고,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p 늘어 증가 속도도 가장 빨랐다고 했다. 또한 한국경제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기준 세대별 경제고통지수가 최악인 연령대는 20대 이하로서 27.2%였다고 했다. 한편, 올 9월 말 현재 1인 가구는 약 937만 가구로 전체의 40.1%에 해당한다고 행정안전부 자료에 나와 있다. 재택근무와 혼족·혼밥 생활의 외로움에다가 실업·물가고·부채에 시달려야 하는 서민들, 특히 20·30대 청년층의 아픔이 만만찮다. 이 나라 미래 세대의 앞길이 어둡다. 게다가 정치판은 온통 여야 제1·2당 위주의 내년 대통령선거운동 보도로 혼탁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인지라 정권 교체로는 의미가 없다. 정녕 국리민복을 위하는 최선의 제3 지도자를 옹립해야 한다. 썩어 구린내 나는 정치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왠지 구세군 종소리가 슬프다. 오미크론과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역경이다. 아마릴리스 꽃은 희망이다. 음력 동짓달 보름달이 뜨는 세밑, 민초들에게 이 꽃과 같은 활력이 넘치기를 빌어 본다. 단시조로 간구한다.

- 달빛 정원사 -

 병 주고 약을 주는
 코로나 꽃밭 세상
 
 꽃 스스로 피어나게끔
 가꿀 분이 절실하다
 
 휘영청
 은은한 달님
 그 원정(園丁)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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