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성이 있다. 82세로 고령이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내 손으로 간단한 장을 보고 차도 끓여 마실 만큼 거동에 무리가 없다. 오페라 아리아를 감상하는 취미를 즐기는 노인 안소니는 런던의 고급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내 집. 눈을 감고도 집안 곳곳을 충분히 그려 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이 공간의 인테리어가 교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파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내 집이건만 사위라는 사람은 자신의 집이라 우기고 있다.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들었을 때 안소니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재산을 탐내는 딸과 사위의 계략일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어쩐지 아끼던 고가의 손목시계도 최근 자취를 감췄다. "고얀 것들." 2021년 개봉한 영화 ‘더 파더’는 고령의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 안소니 홉킨스는 82세의 나이에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명연기를 펼쳤다.

지근거리에 살던 딸이 느닷없이 파리로 떠난다는 말을 불쑥 꺼냈다. 비록 안소니의 건강에 별 이상은 없지만 어쨌든 고령인 아비를 두고 떠난다는 결정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다음 날 딸은 파리에 가지 않을 거라 한다. 아니 한 술 더 떠 그런 언급은 한 적도 없다고 펄쩍 뛴다. 어느 날은 혼자 사는 집에 발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낯선 사내가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사위라고 말한다. 큰딸은 몇 해 전 이혼을 했는데 말이다. 재혼했다는 언급도 없는 무뚝뚝한 큰딸 대신 작은딸이 보고 싶었다. 유쾌하고 재능이 많은 작은딸은 화가로, 해외에 있어 자주 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종종 와 주면 좋으련만.

그런 중에 큰딸은 집에 간병인을 들이려 안달이다. 나이가 들어 행동이 느린 자신을 환자 취급하는 딸도 간병인도 모두 안소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큰딸은 남자 문제도 복잡해 보였다. 전남편이라는 사람은 둘이나 됐고, 이제는 또 파리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갈 거라는 황당한 소리를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을 뺀 주변 사람 모두가 한 패가 돼 수상한 일을 벌이는데, 손목시계조차 찾을 수가 없다. 지금이 몇 신 줄 알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은데 말이다.

안소니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영화 ‘더 파더’는 딸과 사위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도 하고, 자신의 집이 딸의 집이 됐다가 병원으로 바뀌기도 한다. 같은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는가 하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느 순간 저녁 시간으로 점프해 버리기도 하는 등 혼란스럽고 미스터리한 일들이 발생한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안소니의 치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 ‘더 파더’는 치매 부모를 돌보는 가족의 고단한 시점이 아닌, 본인이 치매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기억을 잃어 가며 겪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리고 있다. 흐려지고 지워지는 기억 앞에서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도 무력화된다.

영화 ‘더 파더’는 간병 가족의 피폐해지는 삶만큼이나 환자 본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공포를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려 냈다. 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매는 더 이상 가족 내에서 감내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님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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