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희망은 고통스러운 현재를 인내하고 불안한 미래를 견디는 효율적인 장치다. 기대나 바람은 절망과 고통을 이겨 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면 더 큰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치명적인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희망은 제우스가 인간에게 불의 사용법을 알려 준 프로메테우스를 골탕먹이기 위해 그의 동생인 에피메데우스에게 선물한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가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가지고 온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절대로 들여다보면 안 되는 상자를 성질 급하고 허영심 충만한 애물덩어리 판도라가 기어코 열면서 그 상자 안에 있던 온갖 질병과 재앙이 인간 세상을 향해서 퍼져나가게 됐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급히 상자 뚜껑을 닫아 버리자 워낙 느리고 둔했던 희망만 상자 안에 그대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도라 신화는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자못 긍정적인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은 아무리 가혹한 시련과 재앙이 불어닥치고 혹독한 불운과 불행이 엄습해도 희망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서 따뜻한 위로와 훈훈한 격려를 아끼지 않고 새로운 의욕과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켜 준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우리의 대통령선거는 전혀 희망적이지 못하다. 보수를 궤멸시키다시피 한 냉혹한 칼잡이 쪽이나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일상으로 일삼는 말장난의 고수이자 차베스를 능가하는 위험천만한 포퓰리스트 쪽이나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국민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거대한 검찰 공화국이 돼 가혹한 형벌국가로 변질될 것인지, 세금을 마술 지팡이로 삼아 현 정권 이상으로 가짜 일자리를 양산하고 빚으로 허리가 휘는 국가로 퇴보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를 편가르고 이간질시키며 국민이 가난해져야 자신들의 집권이 유지될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한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국가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으며, 그런 나라에 공정과 정의가 자리잡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힘없는 사람은 더욱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부자를 적대시하고 기업을 공격하는 특정 교육단체, 노동단체, 시민단체, 정치단체가 자신들끼리 만들어 놓은 각종 이권 카르텔을 이용해 온갖 편법과 불법, 탈법을 통해 이익을 얻고 별별 혜택을 다 누리며 부를 대물림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지속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이 조폭과 양아치 가운데 그나마 누가 더 국가의 지도자로 적당한가를 따지는 비극적 선거가 되지 않으려면 후보자 누군가는 예컨대 몇 가지 희망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를테면 연금과 공기업 개혁, 각종 경제 관련 규제 철폐를 비롯해 공수처와 탈원전 정책 폐지와 산 권력을 수사할 수 있게 검찰의 독립성을 찾아주는 일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실용’ 또는 ‘실용주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실용주의’는 이념도 철학도 아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지식도 없고 지적 전통도 없던 미국이 유럽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위해 다수에게, 과거 MB정부의 비주류 운동권 기회주의자들이 정통 주사파들에게 했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자기 고백이 ‘실용’이다. 

절대로 자유민주주의가 ‘실용’을 수용하거나 추구할 수는 없다. ‘실용주의’는 가치도 철학도 정치 이념도 없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이번 대선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뒤틀리고 기형적으로 왜곡된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그 의미가 있으며, 여기에 대한민국의 희망도 걸려 있다.

국민은 오로지 집권을 위해 세금으로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고 떠벌리는 지도자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지도자와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일만 터지면 책임을 실무자에게 떠넘기는 야비한 지도자도 물론 원치 않는다. 

사랑과 미움이 동전의 양면이듯이 과도한 절망은 과도한 희망의 또 다른 얼굴로 드러나기 십상이다. 헛된 희망보다 절망적 한계상황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한 사르트르의 생각에 동조해야 하는지 망설이게 하는 대선이 희망의 운명 앞으로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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