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 시인
문계봉 시인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못) 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인 ‘견지망월’, 능엄경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여기서 달은 본질, 손가락은 형식이나 지엽적인 것을 말합니다.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말이나 글과 같은 형식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의미겠지요. 후에 많은 고승대덕도 이 말을 인용해 숨은 본질은 놓치고 드러난 형식에만 집중하는 본말전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말들이 부딪쳐 정치도 현실도 숨 가쁜 요즘입니다. 국민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감당하기 쉽지 않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는데, 선거를 앞두고 다시 난무하는 공허한 말들의 잔치에 국민은 이중으로 피곤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차선은 고사하고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선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평범한 서민들에게 힘겹지 않은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때나 나름의 질곡은 존재했고, 그 상황에 편승해 부도덕한 이익을 편취하는 이들도 존재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양산하는 다양한 음모론 속에서 국민은 현기증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치가 국민을 외면한 채 권모(權謀)와 술수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 혹세무민하는 일부 종교인들은 하늘의 달을 가리키면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달은 그만두고 손가락만 바라보라고 호도하곤 했습니다. 

그 사이 언론을 믿지 못하는 국민은 "언론은 믿을 게 없다"라고 강변하는 유튜버 등 사이비 언론에 경도됐고, 신의 자비란 교세를 먼저 확장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인들에게 나눌 때 빛나는 것이라는, 거짓 신탁을 서슴없이 유포하는 삿된 종교인들이 득세했습니다.

엄청난 표를 몰아주며 오랜 적폐를 청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대 여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지리멸렬해지거나 정파적 이익에 혈안인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결코 ‘달’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모두가 매끈하게 다듬어진 손가락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윤이 나는 그 매끈한 손가락들은 진실을 가리고, 사랑을 가장하고, 위로와 격려의 시간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달을 봐야 하는 국민이 손가락만 본다고 탓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책임 전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훔치거나 숨겨 둔 달을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이것이 오늘로 종언을 고하는 2021년의 서글픈 초상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새해의 아침까지 묵은해의 질곡들을 끌어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달’을 찾고 진실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합니다. 저 가증스러운 오도(誤導)의 손가락들을 냉정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다행히 봄이 우리 곁을 찾을 무렵에는 지도자가 바뀌는 선거가 있습니다. ‘매끈한 손가락들’이 잠시나마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입니다. 이때야말로 우리 스스로 달을 가리키며 상현의 성취와 하현의 물러남에 대한 삶의 교훈을 온전히 그들에게 되돌려줄 때입니다. 

지난 일주일 추위는 지극히 맹렬했습니다. 바람에서는 적의마저 느껴졌습니다. 천연덕스레 밝은 햇살을 보면서도 방심할 수 없었습니다. 한 해의 끝 무렵에 만나는 이 모진 추위는 조만간 열릴 새해에 대한 모종의 암시 같았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우리는 힘들게 견뎌 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짙은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오고,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은 더욱 찬란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는 법입니다.

이제 더는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에만 현혹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왜 달을 가리키며 정작 달을 가리느냐고 저 ‘매끈한 손가락’들을 탓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만은 저들의 속성이고, 위선은 저들의 고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진실의 달’을 찾고, 그것을 서로 나누며, 끝내는 본디 우리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빼앗긴 권리들을 되찾기 위해 손가락을 들어 모두의 달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에 우리가 찾는 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때 우리는 손가락을 보는 일과 달을 보는 일이 우리에게는 구별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때가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긴장하게 만드는 겨울이라는 건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소멸할 것은 다 소멸하고 남은 생명만이 봄날의 부활을 꿈꾸는 계절인 겨울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자 힘의 축적기입니다. 이렇게 준비되고 축적된 힘들이 건강한 생명력으로 표출되는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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