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전, 가난의 굴레에 얽매인 탓에 아무도 신경을 써 주지 않던 어린 소년에게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운 교장 선생님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소년의 가슴을 울렸고, 소년은 평생을 바쳐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스승이 되겠노라 다짐한다. 40여 년 오로지 아이들을 생각하며 은퇴한 뒤에도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보여 주는 ‘국민 스승’ 전근배 씨를 만났다.

전근배 씨가 수원시 장안구청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전근배 씨가 수원시 장안구청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 황석마을의 총각 선생님, ‘사랑의 종소리’ 울리다

 1968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장평리.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골 황석마을에 언제부턴가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삐리리릭∼.’ 오후 8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호각 소리에 동네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향했다. 각자의 책상 앞에 모여든 아이들은 잔뜩 긴장한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똑똑. 익숙한 노크 소리에 허리를 힘껏 바로 세웠다. "선생님 오셨다!"

 깡촌 마을에 첫 발령된 전근배 씨는 혈기 왕성한 스무 살 청년이었다. 중학교 등록금도 없을 만큼 가난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재건학교(야간학교)를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해 인천교대에 진학했다. 부모는 물론 도와주는 이 하나 없던 시절, 그의 손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교장 선생님이었다. 하루 열 번씩 "할 수 있다"를 외치던 교장 선생님은 가진 거라곤 없던 그의 마음을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채웠다.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위해 몸 바치는 선생님이 되겠다 다짐한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꿈을 이룬 청년 선생님의 머릿속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했다. 교사가 돼 정해진 수업을 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안락했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교사가 던진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우물쭈물 하다간 내 꼴 된다." 적당히 일하고 동료들과 막걸리 마시며 무료하게 보내는 인생. 아찔했다.

1968년 용인시 백암면 장평리 황석마을에 세워진 종각의 모습. 전근배 씨가 호루라기를 불며 아이들 가정 학습을 돕자,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줬다.
1968년 용인시 백암면 장평리 황석마을에 세워진 종각의 모습. 전근배 씨가 호루라기를 불며 아이들 가정 학습을 돕자,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줬다.

 전 씨는 그 길로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80여 명의 아이들이 모여 사는 황석마을로 향했다. ‘가정 학습’을 위해서다. 오후 8시면 어김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호루라기를 불었고, 호각 소리를 신호로 집집마다 아이들이 공부를 시작했다. 직접 가정을 방문해 학습지도를 하다 오후 10시가 되면 다시 호루라기를 불어 잠자리에 들도록 생활 습관을 자연스레 길러 줬다.

 그의 열정은 마을도 변화시켰다.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는 전 씨를 위해 마을 이장과 목수들이 나서 직접 나무를 깎고 마을 중앙에 높은 종각을 세워 종을 달아 줬다. 덕분에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종소리’는 마을 전체를 관리하는 ‘희망의 종소리’로 발전해 갔다. 해가 뜨는 오전 5시께,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면 잠에서 깬 주민들은 일터로 향하고, 전 씨는 남은 아이들을 모아 체조를 하고 양치를 시키며 등교 준비도 도왔다.

 종소리가 끝이 아니었다. 자신처럼 학비가 없어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부녀회를 조직하고 가정마다 ‘절미(節米) 운동’을 진행해 진학금 통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마을 어린이들이 맘껏 뛰어놀도록 주민들과 함께 의자와 철봉, 축구 골대를 만들어 어린이놀이터를 조성했다. 젊은 총각 선생의 작은 봉사는 어느새 다같이 잘 사는 마을을 위해 모두가 힘을 보태는 일종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 인생의 ‘용기와 희망’을 가르치는 선생님

 황석마을에서의 경험은 전 씨의 교육철학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저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교과서적 지식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아닌, 지식 그 이상의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5년 만에 황석마을을 떠나 수원 영화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꾀죄죄한 몰골에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저소득층 아이들이었다. 당시 전교생 2천500여 명에 60여 학급이던 영화초에는 이발비도 없어 머리를 기르고, 아니 길도록 방치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전 씨는 다시 한 번 독특한 아이디어를 냈다. 학교에 ‘이발소’를 설치했다. 이른바 ‘새마을 이발소’로 이름 붙인 이곳은 이발비가 없어 머리를 못 깎는 아이들에게 무료 이발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발사는 전 씨와 동료 교사, 두 명이었다. 전 씨와 동료 교사는 방과 후 반에서 한두 명씩 직접 데리고 와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2년여간 운영된 학교 안 작은 이발소를 두고 "튀는 행동을 한다", "왜 혼자 잘난 체 하느냐"는 시기와 질투의 목소리도 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난을 이유로 무시와 무관심이 당연했던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선사하고, 덕분에 깔끔해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났다.

 전 씨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심어 준 지혜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힘이었다. 수원 남창초등학교에 근무할 땐 고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 특별 지도를 진행해 3개월 동안 26명의 아이들이 ‘눈을 뜨게’ 했다. 용인초등학교에 재직할 당시에는 지체장애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특수아동 학급을 맡아 삶에 꼭 필요한 기초학력과 체력단련 지도에 앞장섰다.

 전 씨는 학생 중심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도교육청, 광주하남교육청 등에서 장학사, 정책과장, 교육장 등을 거치며 학생 진로교육, 학생 인성교육 및 경기교육정책 전반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학생들의 인생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선생, 경기교육의 미래지향적 정책과 혁신교육 정책 개발을 통한 학교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2동을 중심으로 ‘전 국민 우측통행 준법 정신교육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전 씨.
수원시 장안구 조원2동을 중심으로 ‘전 국민 우측통행 준법 정신교육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전 씨.

 # 학교 담을 벗어나도 상생을 가르치는 ‘국민 스승’

 교사 20년, 관리직 20년 5개월. 총 42년 5개월여의 교직생활 내내 교직원과 학생의 변화를 위해 앞장서 온 그에게 퇴직 후 인생은 또 다른 교육의 연장선이다. 학교 담장은 넘었지만 결코 교육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진 않았기 때문이다.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이 되겠단 다짐은 지역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국민 스승’이 돼 인생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야겠단 다짐으로 승화했다.

 첫걸음은 ‘폭력 예방 교육’이었다. 전 씨가 퇴직할 즈음 안산에서 초등학생 여아가 강간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학교폭력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아이들의 뉴스가 종종 들려왔다. 그런 뉴스를 접하며 드는 마음은 안타까움과 허탈함, 미안함이었다. 누군가의 제자였을 그들에게 교육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저런 사건의 범인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독도 사랑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가 퇴직하던 2010년, 일본이 초등학교의 모든 사회과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며 파문이 일었고, 곧바로 관련 교육 자료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학생용·교사용·성인용 교육 자료를 손수 만들어 도내 각 지역 초·중·고교와 대학교, 기관 및 단체들을 찾아가 열성적으로 강의를 했다. 성폭력·학교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의 위험성을 알리는 한편,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을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

수원시 효봉노인전문요양원에서 진행한 색소폰 재능기부.
수원시 효봉노인전문요양원에서 진행한 색소폰 재능기부.

 재능기부도 잊지 않았다. 교장으로 재직하며 취미로 배운 색소폰을 지역 노인들을 위해 연주했다. 경로당, 요양원, 주간보호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재능기부를 할 때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하나를 꺼내 쥐어주는 할머니도, 두 손을 꼭 잡고 "선생님, 다음 연주는 언제예요?"라고 묻는 할아버지도 만났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웃음 짓고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악기 연주 하나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선사한다는 사실이 그저 즐겁고 힘이 났다.

 요즘 전 씨는 자신처럼 ‘국민 스승’으로 함께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2016년 거주지인 수원시 장안구 조원2동에 새마을지도자협의회를 만들고 30여 명의 퇴직 노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전 씨는 아파트 단지 등에서 폐건전지를 수거하며 환경 오염 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전 씨는 아파트 단지 등에서 폐건전지를 수거하며 환경 오염 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전직 교장 선생님을 포함해 전매청에서 일하던 공무원, 대학교 부총장, 사업가 등 다양한 곳에서 평생을 헌신한 이들은 층간소음 예방교육, 국경일 국기 달기, 폐건전지 수거 사업, 전 국민 우측통행 준법정신 교육 등 작게는 거주하는 동네에서부터 지역사회와 상생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한다.

 예순이 넘은 황석마을의 개구쟁이 제자들은 전 씨를 찾아와 말한다. "선생님, 인생의 힘든 고비마다 온 마을과 함께 저희를 돌봐주신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중학교 등록금도 없어 희망을 걷어찬 채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던 전 씨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해 준 교장 선생님이 있었듯,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그 열정을 응원하고 기꺼이 함께하는 지역사회는 오늘도 간단없이 교육의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다.

   박지혜 기자 pjh@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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