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한 외국인들은 본국에서 유행하는 건축물을 지었다. 중국인과 서양인은 벽돌조, 일본인은 목조 건축을 선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건자재 공급체계가 부족해 대부분은 자국에서 수입한 자재로 건물을 세웠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공공건축을 중심으로 벽돌조 또는 벽돌조와 철근콘크리조를 혼합한 건축물이 증가하면서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벽돌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때 세워진 벽돌공장은 양질의 흙과 풍부한 수량을 갖춘 도시 외곽 지역에 입지했다. 1932년 숭의동(당시 명칭은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314번지에 설립된 인천요업㈜은 연간 벽돌 생산량 60만 개 규모로 인천지역에 세워진 첫 번째 대규모 벽돌공장이었다.

1939년 11월 설립된 부평요업㈜을 필두로 부평 지역에도 벽돌공장이 들어선다. 부평요업 본사는 부평동 665(부평역 해링턴플레이스 아파트 단지), 공장은 부지 13만8천㎡ 규모로 부천시 상동(당시 명칭 소사 상리)에 위치했다(조선신문 1939년 11월 28일, 12월 10일). 이때부터 이곳은 벽돌막, 새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정확한 명칭과 설립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제 말 부개동에도 벽돌공장이 세워졌다. 부개동 벽돌공장은 해방 후 최성순이 불하받아 부평연와합자회사가 된다. 부평연와는 부평구 부개동 120번지에 공장을 두고, 중구 경동 210번지에서는 사무소를 운영했다. 당초 신마분리로 불리던 이곳에 벽돌공장이 들어선 뒤부터는 벽돌공장을 뜻하는 벽돌막, 새말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벽돌막과 새말이라는 명칭이 같이 쓰이는 경우는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벽돌막(새말)도 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벽돌공장이 세워지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주택이 들어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되면서 새말이라는 명칭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시대에는 기와나 벽돌을 굽던 가마를 관할하던 기관은 ‘와서’라 했고, 가마가 있던 장소라는 의미에서 ‘와현’과 같은 명칭이 붙기도 했다. 공장이 장소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은 이처럼 오래된 일이다. 

설립 시기는 불분명하나 현재의 간석역 남쪽과 북쪽에도 벽돌공장이 있었다. 인천광역시가 제공하는 항공사진을 보면 이 일대에 있었던 벽돌공장의 변천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간석역 남측(현 연와마을)에 있던 벽돌공장은 조선요업(대표 차태열, 간석동 542)으로 본사는 인현동 1번지에 있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36년에 세워진 조선요업㈜을 불하받아 영업을 이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요업의 모습은 1947년 촬영된 항공사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선요업은 1987년 무렵부터 공장 주변에 건물이 세워지면서 바뀌기 시작해 1988년 아파트 완공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간석역 북측에 위치한 벽돌막 사거리라는 지명도 그 일대에 벽돌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단서이다. 1947년 촬영된 항공사진을 살피면 십정동 417번지에 건물이 보인다. 벽돌공장 여부는 확인이 어렵지만, 1967년 항공촬영 사진에서도 규모가 비슷한 건물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들은 1980년 3월 5일 주안에 있던 인천시 농촌지도소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없어졌다. 농촌지도소는 이후 인천광역시 농업기술센터로 이름을 바꾸면서 40년간 자리를 지키다 2020년 12월 계양구 서운동으로 이전했다. 그 터에는 지난해 말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주차장 명칭은 ‘벽돌막 공영주차장’이다.

명칭은 장소나 물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명칭은 역사를 이어나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이름을 지어도 됐을 이 주차장에 ‘벽돌막 공영주차장’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들의 아름다운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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