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기획정책분과위원장

코로나로 지치고 또 지치는 이 겨울엔 평안북도 정주쯤에 있을 여우난골에 한 번 가자. 거기 가서 이미 110살이 넘은데다 엊그제 제삿날이 지난 백석(白夔行)을 오라 하자. 

가다가 가즈랑집에 들러 아들 없는 할머니에게 어느메 산골에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우난골에 가서 온 식구들과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놀아 보자. 

백석은 제 여우난족과 어울리고 우리는 기억도 가물한 할머니, 할아버지, 그 아래 졸망졸망한 식솔들과 한바탕 얘기꽃을 피워 보자. 개에게 쫓기다 고무신을 잃어버려 징징 울던 어려서 죽은 친구도 불러 놀아 보자. 

백석은 오랫동안 잊어야 했던 금기의 시인이었다. 자료도 거의 없고, 당신도, 증언해 줄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지만 지금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훗훗하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미남인 모던보이였다. 그와 란이라 했던 박경련, 그리고 자야로 이어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함께 방언사전을 옆에 펴 두고 기웃기웃해야 겨우 해석이 되는 된장맛 나는 시어들, 그 질펀한 토속 방언과 무속 분위기에 젖다 보면 여기는 빽빽한 아파트 실내가 아닌 깊은 산골에 있는 것 같다. 희미한 피마자등불 사이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숫눈에 고요히 파묻힌 고향길 어드메에 서 있는 듯하다.

자야(진향)는 동료 교사의 송별회 때 만난 권번 기생이었다. 백석이 스물다섯, 자야는 스물한 살이었다.

자야를 만나기 이태 전부터 통영에 사는 18세의 여고생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게다가 매파를 부탁한 친구가 오히려 란을 부인으로 삼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실의에 수첩에 적은 친구의 이름을 지웠다. 자야와의 동거는 그 후 1년 남짓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시 100편을 지어 돌아오겠다며 만주로 떠났다. 1940년 28세의 나이였다. 

그의 북한에서의 활동은 51세에 끝나고 85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일한 시집은 「사슴」으로, 25세 때 100권을 자비로 출간했다. 

소월과는 열 살 차이로 오산학교의 선배이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백석은 소월을 퍽 존경했다.

북에서 파란의 삶을 살다가 월북작가 해금으로 20여 년의 문학사 공백이 40여 년 만에 복원되던 1988년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니라 북에서 태어난 재북시인이었다.

그의 시엔 토속적 방언이 질펀하다. 엄중한 일제시대에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비감함인가, 일본어는 흉내도 못 낼 우리만의 언어를 고스란히 시어로 불러냈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리는 시인이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기억하기에 좋은 겨울이다. 콧잔등이 시큰한 맵찬 새벽, 미루나무에 걸린 눈썹달 너머 검은 산속에서 처녀귀신이 눈을 치뜨고 바라보는 것만 같아 얼어붙던 그 고향 밤을 떠올리며 잠시 쉬고 싶음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이 진정 사랑한 나타샤는 누구였을까?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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