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칼럼니스트
김호림 칼럼니스트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1세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시민임을 근거로 자기를 죽이려고 모함한 유대인의 법정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법정에 서도록 상소한 이야기가 성서에 나온다. 이는 로마인들이 지역과는 무관하게 로마법에 따라 법적 사건을 판결받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시민권 제도는 공화정 시절부터 정치의 중심이자 충성스러운 복속자(服屬者)들을 제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이었고, 혜택이 많아 이 특권을 얻으려고 라틴인들은 싸우기까지 했던 지위였다. 

이 같은 시민권은 시민으로서의 행동, 사상, 재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오늘날 이러한 ‘자유로운 시민’이 전제되는 헌법적 가치는 무엇을 포함할까? 우리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다. 민주는 민주주의를, 공화국이란 공화제(共和制)를 실시하는 국가이다. 즉, 국가의 주권이 다수의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가를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국가의 공동 소유자인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러한 민주공화국의 체제를 떠받치는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시민의 존재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난해 미국 ‘후버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사학자가 쓴 책 「사라져 가는 시민(The Dying Citizen, By Victor Davis Hanson)」에서 저자는 그 위협의 원인으로 진보적 엘리트의 영향과 종족주의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세계화의 역기능을 들고 있다. 그 주장은 이러하다. 미국민에게 가장 소중한 이상적 가치인 시민권 개념이 지난 반세기에 걸쳐 많은 세력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다. 먼저 시민이 자치를 위해 경제적 자율성을 가져야 하나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불평등 심화는 다수의 미국인을 연방정부 의존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민권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존재하나, ‘글로벌 시민정신’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착을 무력화시켰다. 

그 다음 진보학자와 좌편향 활동가들이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영향이다. 정체성 정치란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이념으로,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전통적인 정당정치나 보편적 정치에서 벗어나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곧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전통적이며 집합적인, 개인의 시민권 개념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때문에 위협이 된다. 

또한 광범위하게 확대된 비선출 공직자의 관료주의가 선출직의 권력을 압도해 시민의 주권적 권력을 파괴했다. 결국 진보학자와 좌편향 미디어를 비롯한 논객들은 전통적인 헌법상의 시민권과 제도를 포획하고 해체하려 함으로써 시민권은 취약성 위험에 직면하게 됐고, 그 결과 국가도 취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제 이러한 시민권의 상실 문제를 세계화 관점에서 이 나라에 적용해 보면 어떤 모습이 될까? 이 나라 시민의식의 시작을 1948년 건국 기점으로 보면 70여 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므로, 대내외적으로 시민권에 대한 위협이 가해 온다면 강고하게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나라는 미국과 달리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세력(Big Money)이나 대형 정보기술기업(Big-Tech)과 같은 글로벌 주도 세력이 없으므로 세계화가 시민권과 국가권력을 취약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세계화와 미·중 밀월의 영향으로 공산권이었던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냉전 시대의 멸공이나 반공의 대상이 아니라, 선린과 교역의 상대로 모호한 이웃이 돼 버린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세계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패권 야욕을 드러내자 미·중 관계가 다시 적대적으로 악화돼 우리의 설 자리가 곤혹스럽게 됐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안미경중(安美經中)이 과연 지혜롭고 가능한 선택인지를 시험받게 될 것이다. 

이런 엄중한 현실에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가 최근 언급했듯이, 어느 칼럼니스트는 이번 3·9 대선을 "속국으로 사느냐, 동맹으로 가느냐"라는 중요한 선택의 문제라고 제기했다. 분명히 속국에서는 시민과 시민의식 그리고 시민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는 우리 헌법 10조의 국민 행복추구권과 존엄성 규정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시민의식 고취와 올바른 시민권 행사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국가 운명은 현명한 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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