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대통령선거판에 자주 소환되는 개념 중 대표적인 것이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에 올라타려는 후보들의 노력은 가상하기보다 시대를 거스르려는 욕심이 더 커 보인다. 

사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대정신이란 말조차 없었다. 헤겔은 시대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고, 모든 가치는 변화 속에서 보편성을 축적한다고 여겼다. 그는 19세기 초 유럽 문제를 분열로 파악해 이 분열을 통합하는 힘으로서 ‘자유의식의 확장’을 시대정신으로 삼았다. 오늘날 헤겔 철학을 자유의 철학으로 보는 배경이고, 시대정신이란 말이 출현한 것이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보수의 언론들이 특히 시대정신 찾기에 혈안인 듯 보인다. 물론 논객들이 그렇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현실성을 왜곡하는 데 서슴지 않는다. 국민들은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국격은 추락하고 정치 광신도들을 날뛰게 부추긴다면 과언일까? 

그들, 정치 광신도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부조리가 왜 일어났는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니 그저 입맛에 맞으면 열렬히 추종하면서 상대방을 탓하고 욕하며 적대시하는 것으로 위안을 찾는 것뿐 아닐는지. 그들의 기본 감정을 분노일 뿐이다. 그들은 많은 고민거리를 분노 하나로 치환하는 걸 습관화했다. 이번 대선에 비호감도 1, 2위 후보가 지지율에서 1, 2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이런 바탕 위에서 계속 굴러가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이걸 부추기는 언론이라는 이름의 비공식 총괄선대본부가 있어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아는가. 2019~2020년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에서 발표한 한국의 ‘언론신뢰도’가 45개국 중 꼴찌라는 사실을. 그런데 언론이 선대위 역할을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뢰하지 못하는 언론이 그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육하원칙에 맞춰 기승전결, 정연한 글과 말이라고 해서 언론의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들은 읽고 쓰는 게 완벽하다는 이유로 특권을 누린다. 공적인 선을 지양하지 않으면 정론이 아니며 곡필일 뿐이다. 사이비 언론이다. 자본·권력·불의·요령이 세상살이에 더 편하고, 그런 불한당들이 더 잘사는 사회를 만들려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며 언론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총보다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신념은 갖지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공분에 대해 분개하고 미래를 밝힐 공기(公器)로서의 자존심은 가져야 하는 게 그저 당위론인가. 

오래전 교과서에 이미 나와 있었다. 시대정신을 밝히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막힌 건 뚫어 소통케 하고, 시무(時務)에 대해서는 가늠쇠 역할을 해야 한다. 골수에 박힌 나랏병을 고치려는 결기가 있으면 좋겠고, 마음 깊숙이 끓어오르는 열정에 기대가 있어 시비를 가르고 죽비소리 같은 글과 말을 해야 한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뽑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웅얼웅얼 대면서 목적은 감추고 껍데기를 포장하는 표현에 익숙하면 명기자요, 훌륭한 신문사의 구성원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다는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근본을 생각해야 한다. 

루카치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다. 시대정신이 실종된 참으로 천박한 대선이 펼쳐지면서 여야 후보 사이에 부동산, 청년, 복지정책 등은 서로 정책을 추격 매수하듯 도박판에서 판돈 올리듯 베끼기 경쟁이 한창이다. 여기에 더해 "내가 정권 잡으면 그쪽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라는 협박이 방송에서 울려퍼지는데, 청년지도자란 인물은 이걸 두고 "사업하시는 분이라 좀 세게 나온 것뿐이다"라고 한다. 법과 공권력의 전횡을 일삼은 이기적 자존감은 도처에서 우리 서민을 옥죄는데….

이제 대한민국에서 더 기다릴 게 무엇이 있을까. 3월 9일 대선 전까지 법에 보장된 지방선거 예비후보의 활동은 사실 물 건너갔고, 오로지 대선 올인이라는 정치공학적 계산은 끝났다. 지방선거가 대선의 막간 이벤트라고 여기는 걸까? 참으로 한심하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