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범 국가 무장해제, 냉전시기 힘의 균형 등을 명분으로 세계 각지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시탐탐 한반도의 공산화를 노리는 소련의 존재와 그 야욕에서 비롯된 한국전쟁도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더했다. 

유구한 역사 위에 자리잡은 한반도는 내부 혼란과 외세 침략 등으로 외국 군대가 주둔한 일이 잦았다. 삼국통일,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시기가 대표적인 예다. 그럼에도 반세기가 넘는 휴전으로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에 역사상 가장 오래 주둔한 외국 군대는 주한미군이다. 미군과 함께 성장한 여러 도시들 가운데 대표적인 지자체가 의정부시다. 

이런 연유로 기호일보는 의정부의 명물로 ‘부대(기지)’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미군 기지를 평택·오산, 부산·대구 2개 권역으로 이전하는 분위기에서 일부 부정적인 사건·사고들이 발생했지만, 미군 부대와 함께 도시가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특성 자체가 곧 ‘지역의 이름난 사물’(명물의 사전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전경.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 전경.

# 의정부 지리적 특성과 미군 부대 배치 과정

의정부시의 지정학적 위치는 수도 서울 중심의 광화문에서 북동 방향으로 40여㎞ 지점에 위치한다.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은 서울을 함락시키고자 의정부를 주요 남침 경로로 이용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의정부 전투’는 남한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육군 제7사단의 목숨을 건 항전에도 불구하고 25일 오후에만 동두천과 포천이 북한에 점령되고, 다음 날 의정부 방어선까지 무너지면서 3일 만에 심장부 서울이 함락됐다.

뼈저린 교훈을 얻은 미군은 접경지인 경기북부에 미군 부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의정부를 비롯해 동두천·파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오로지 반(反)공산화를 목표로 일제가 군사기지화했던 인천·부산·용산 등에 부대를 배치했던 사실과는 상이한 대목이다.

의정부에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공여된 221만3천여㎡의 터에 8개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해당 부대는 ▶캠프 라과디아(가능동) ▶캠프 홀링워터(의정부역 앞) ▶캠프 에세이욘(금오동) ▶캠프 카일(금오동) ▶캠프 시어즈(〃) ▶캠프 잭슨(호원동) ▶캠프 레드클라우드(가능동) ▶캠프 스탠리(고산·용현동)이다.

2007년 5월 캠프 잭슨, 캠프 레드클라우드, 캠프 스탠리 등 3개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5개 부대는 의정부시에 반환됐다. 미반환 부대 3곳은 현재 빈 땅으로 방치되면서 지속적으로 조기 반환 필요성이 제기된다.

반환 부대에는 공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구체적으로 캠프 라과디아 체육공원, 캠프 홀링워터 무한상상 시민정원, 캠프 에세이욘 경기도교육청 북부청사와 의정부 을지대학교병원, 캠프 시어즈(일부) 경기북부경찰청 등이다. 

캠프 카일과 캠프 시어즈(일부)는 각각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청소년 미래 직업 테마파크 나리벡시티가 조성될 예정이다.

의정부시에 주둔했던 과거 미군 부대 모습.
의정부시에 주둔했던 과거 미군 부대 모습.

# 부대와 함께 성장한 도시 

의정부문화원에 따르면 이화여자대학교 조사에서 의정부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숙박, 식품, 접객업소 등 3차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1983년 출판된 도서 「한국의 발견/한반도와 한국사람 경기도」 또한 의정부를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발달한 도시로 묘사했다.

한국전쟁 이후 의정부 인구도 꾸준히 증가했다. 1956년부터 양주군 의정부읍에서 시로 승격한 1963년까지 매년 9% 이상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또 1985년부터 1995년까지 72.8%의 폭발적인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시민들이 미군 부대와 관련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부양 능력을 충분히 갖췄기에 가능했다. 관련 직업은 미군 부대 내 한국노무단(KSC), 목수, 보급전문가, 하우스보이(군인 숙소 잡일 처리를 담당하는 소년) 등이다. 부대 밖으로는 향군 클럽, 양식점, 양복점, 미군 용품 판매업 등이 성행했다.

이 같은 다양한 일자리들은 외지인들을 의정부로 유인하는 역할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먹고살려고 미군을 따라 몰려온 사람들이 70%에 이른다는 주장도 꽤 나왔다. 

여기에 미군 부대 주변에 형성된 상권은 미군의 소비로 활성화되면서 지역경제가 발전하는 구조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미군들이 급여를 받는 날에는 의정부 도시 전체가 들썩들썩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미군은 도시 개발의 과도기였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 의정부 지역의 도로 정비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장비와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도 맡았다.

의정부에 있던 미군 부대는 면적으로 보더라도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시 면적 81.54㎢의 7%에 이를 정도였으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시 면적의 59%가 임야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다.

특히 의정부 15개 행정동 중에서 가능·고산·금오·의정부·호원동 5개 동에 부대가 위치했고, 그 주변으로 직업군이 형성됐기에 미군 부대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평가가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의정부시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는 외국인들.
의정부시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는 외국인들.

# 부대가 낳은 대표 문화, ‘부대찌개’와 ‘블랙뮤직’

지역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십중팔구 ‘의정부’하면 ‘부대찌개’를 생각하리라 여겨진다. 의정부 부대찌개는 부대 고기, 햄, 소시지의 풍미 가득한 음식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의정부문화원의 자료를 보면 1960년대를 살았던 노인들은 당시 부대찌개를 미군이 먹다 버린 잔반을 섞어 만든 ‘꿀꿀이 죽’으로 회상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곳에서는 같은 방식의 부대찌개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어 원조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정부가 부대찌개의 원조 도시가 된 이유는 그만큼 미군 부대가 많았고, 그 영향이 컸다는 데 있다.  

양주에 속했던 도시가 시로 승격해 분리된 가장 큰 이유도 미군 부대로 인해 도시 규모가 팽창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무엇보다 의정부시민들이 가난에서 비롯된 음식의 추억을 살려 지역의 특화 음식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부대찌개 원조로 거론되는 가장 큰 이유다.

시민들의 노력 덕에 부대찌개 음식점이 즐비했던 지역(의정부시 태평로137번길 22의 1)은 경기도가 2009년 부대찌개 특성화 거리로 지정했다. 2013년에는 ㈔의정부부대찌개명품화협회가 설립됐고, 현재까지도 ‘의정부 부대찌개 축제’가 열릴 정도다.

의정부 부대찌개 브랜드 가치 상승은 식당 간 상호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동일한 상호를 2개의 식당이 사용하면서 법정 소송이 진행됐다. 2013년 법원이 먼저 상표(서비스표) 등록을 한 식당보다 상호를 먼저 사용한 식당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리면서 분쟁은 일단락됐다.

의정부 블랙뮤직 페스티벌.
의정부 블랙뮤직 페스티벌.

의정부는 미군 부대의 영향으로 흑인들이 부르거나 연주하는 음악을 통칭하는 ‘블랙뮤직’을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 절정인 힙합 분야의 성지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국내 원조 힙합 래퍼 타이거JK, 윤미래가 의정부와 연관이 깊다. 이들 두 뮤지션은 결혼한 뒤에도 의정부에 거주하면서 음반 제작 작업실까지 운영 중이다. 윤미래는 주한미군이었던 흑인 아버지를 따라 의정부에 터를 잡고 가수로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시 또한 블랙뮤직을 특화해 ‘의정부 블랙뮤직 페스티벌’을 지난해까지 3회째 개최했다. 시는 미군 부대에서 기인한 음악적 특성을 대표 축제로 탈바꿈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와 문화도시 이미지를 제고한다는 구상이다.

의정부=김상현 기자 ksh@kihoilbo.co.kr

사진=<의정부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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