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차가우면서도 삽상했다. 전방지역인 경기도 파주 일대의 이즘 날씨다. 겨울 밤하늘 별빛 아래 시골집 거실, 장작불 난로 앞 시붕(詩朋)과의 대화는 두런두런 낭만 그 자체였다. 마당 한쪽 땅속에 묻어 둔 재래식 김치 맛은 도회지 냉장고 속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막걸리에 곁들이는 새큼달큼한 맛은 어떤 신과학적 냉장고 김치라도 견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공릉천 인근 평야에는, 철새들이 무리무리 벼 그루터기 사이를 거닐며 유유히 이삭을 쪼아 먹고 있었다. 인간을 저어하지 않는 오동통하고 큼지막한 새들, 날아오를 때 꼬리 부분에 둘린 서너 줄 순백색 깃털을 뽐내면서 금세 줄지어 가는 모습의 야생 기러기 떼를 이리 가까이에서 볼 줄이야…. 문인화 칠 때, 저물녘 하늘에 제각기 3자를 그리던 주인공들―쇠기러기, 줄기러기 들이었다. 

공릉천변 길에 올랐다. 한강 염수와 송추계곡 민물이 합류하는 널따란 습지, 가뭇없이 펼쳐진 갈대숲에 굽이굽이 맺어진 갯골이 어우러져 왔다. 대자연의 풍광에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왜 기러기들이 인간에게 곁눈 거의 주지 않고 유유자적했는지 느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그들의 주 무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인공인 그들에게 한 옵서버였을 뿐이다. 이어, 겨울 하늘에 엄청 장엄한 춤사위를 펼치던 천수만 새 떼가 클로즈업돼 왔다.

"꿈 같은 이 세상을 살아생전 또 보리야/ 바람 불듯 물 흐르듯 신비로운 선율처럼/ 오만상 다 자아내는 천수관음 춤사위를∥ 연출자도 뵈잖는데 제 스스로 열연하는/ 해거름 놀진 호수 펼쳐지는 저, 저 장관/ 그 중에 뫼비우스의 띠, 타고 마냥 내달리니∥ 밑도 끝도 없는 것이 돌고 돌아 가는 길이/ 새떼들의 유희런가 피치 못할 숙명인가/ 모두가 한바탕 영상, 그예 사라지거늘." 내 졸음 작품 ‘군무(群舞)’ 3수다. 겨우내 한반도는 인간이 오므라져 있는 사이 온통 군무로 달구는 새떼의 하늘 천국이다. 처음도 끝도 없이 연출되는 저 유희는 한바탕 살다가는 우리네 메타버스 인생과 다름 아니다. 자연 이치의 발현은 이렇듯 숭고하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한 상태요, 그것이 이뤄지는 상황(과정)을 ‘자연의 이치’라 할 수 있다. 이를 자연법칙 내지 순리라고 해 본다. 인위적인 행위를 넘어선 선험적 도리랄까. 어쩌면 우주만물의 생멸 원리와도 통하겠다. 신의 뜻이 스며든 철학일 수 있다. 이러한 자연 이치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사례라면 주저없이 우리 ‘한글’을 꼽겠다. 

작년 말엽 한국어가 유엔 공용어로 채택됐다는 잘못된 유튜브 보도가 있었다. 비록 공용어 채택 캠페인 전개로 판명됐지만, 얼마든지 세계어로서의 고품격을 지녔다고 본다. 우리 한국어 문자인 한글은 이 세상 어떤 말이라도 다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28자는 우주만물의 이치, 즉 자연 이치에 따라 만든 문자이기 때문이다. 천지인 원리를 적용한 모음과 인간의 발음기관 모양을 딴 자음을 28수 천문도의 원리에 따라 이뤘다. 

작년 4월 펴낸 졸저 「한글과 한자의 아름다운 동행」에서 "한글은 하늘이라는 대우주에서 태어난 글자이기에 그 품안의 삼라만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와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다 적을 수 있다고 썼다. 요즘 세계 각국에 한글 배우기 열풍이 몰아치듯이 세계 공용어로 채택되기 십상일 것이다. 

반면 이즈음 국내 상황은 자연 이치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3월 9일 대통령선거 관련 내용으로 혼탁하다. 여야 1, 2당에 기호 1, 2번을 부여하는 것은 불공정의 대표적 사례다. 군소 후보들은 나중에 기호를 정한다. 문맹시대가 아닌데 기호 없이 이름만으로도 되고 남는다. 이 외에도 여론조사에서 특정인을 계속 제외시켜 지지율을 낮춘다든지, 언론 보도나 TV 토론 제외, 선거비용 보조 차별이나 사전투표 부정 문제 등등 불공정 사례로 항의 시위가 잦다. 특히 우편투표(관외 사전투표)는 미국에서조차 부정 시비로 문제가 많다.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세뇌가 된 유권자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지금은 난세다. 이런 나라를 구할 진정한 지도자를 뽑으려면 각자 깨어 있어야 한다. 월드컵 본선 진출한 남녀 축구처럼 공정한 룰이 절실하다. 자연 이치가 통하는 사회를 갈구하며 단시조 올린다.

# 임인년 새 꽃눈 바라기

 입춘절 고목 앵두
 어김없이 꽃눈 떴다
 
 자연 이치 거슬러서
 난장판 된 검은 범들
 
 터진다
 하늘의 혁명
 빛 누리에 죄 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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