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대선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각 당의 경선부터 지금까지 나라의 장래에 대한 깊은 고심의 흔적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경쟁 후보에 대한 비난으로 일관된 그들의 언행에서 실낱같은 희망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불편합니다.

닭과 소가 대화를 나눕니다. 닭이 "사람들은 참 나빠. 자기네는 아이를 하나둘만 낳으면서 우리보고는 무조건 알을 많이 낳으라고 하잖아"라고 말하자, 소는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젖을 먹으면서도 사람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아"라고 답합니다.

어떤 상황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불만이 생기기도 하고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오기도 할 겁니다. 닭과 소처럼 우리도 늘 남 탓을 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비난을 일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난은 순간적으로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선사하지만,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비난을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합니다. 「지혜의 소금 창고」(김태광 저)에 비난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알 수 있는 버나드 쇼의 일화가 나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에게 어느 귀족 출신의 청년이 한때 버나드 쇼의 아버지가 양복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왜 선생님은 양복쟁이가 안 되었나요?"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귀족 청년의 도발에 점잖은 버나드 쇼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그는 "여보게, 듣자 하니 자네 부친은 신사였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청년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때 버나드 쇼는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는 신사가 되지 못했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통찰력과 지혜가 번뜩이는 버나드 쇼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비록 자신의 부친은 곡물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해 빈곤한 어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학교도 그만뒀지만, 지금은 어엿한 극작가가 돼 노벨문학상까지 탔는데 청년은 신사를 아버지로 두고서도 어떻게 컸길래 이렇게 비열한 사람이 됐는가를 꼬집었던 겁니다. 

상대에 대한 폄하와 비난은 고스란히 더 큰 무게로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심이 상대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적이 돼 버린 그들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겠지요. 이것이 요즘 대선판을 보면서 느끼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안타깝습니다.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치인은 ‘큰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전투에서 이기려는 장수보다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때로 작은 전투에서 져줄 줄 아는 장수가 ‘큰사람’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상대의 약점까지도 보듬어 안아주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비난을 들어도 그 비난을 머쓱하게 만들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에게 어느 기자가 "누군가가 당신을 깜둥이라고 놀리면 뭐라고 하실 겁니까?"라고 묻자, 모건 프리먼은 웃으며 "그건 무례한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죠"라고 했습니다. 큰사람의 자질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지 않나요? 

두 사람이 굴뚝에 빠졌는데 한 사람은 그을음 투성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멀쩡하다면, 누가 세수를 할까요? 당연히 멀쩡한 사람일 겁니다. 남의 허물에 집착할 게 아니라 그 허물을 보며 자신을 정화하려는 태도가 ‘큰사람’의 자질입니다. 

TV에서 대선 주자들의 거친 언행들을 보면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이번 대선만큼은 소나 닭처럼 남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큰 정치’를 할 수 있는 ‘큰사람’이 당선됐으면 좋겠습니다. 큰사람만이 큰 정치를 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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