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행궁을 지나다 보면 고즈넉한 기와와 대청 사이로 기합이 들려오곤 한다. 소리에 이끌려 따라가다 보면 검, 창을 든 무사들이 무예를 시연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무예24기의 모습이다.

수원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이야 익숙한 광경일지 모르지만 관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조선시대 한가운데 들어선 듯한 착각을 일으켜 멍하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제는 수원의 주요 문화로 자리잡은 ‘무예24기’와 수원시립무예단은 사실 처음부터 수원에 있지는 않았다.

무예단이 소속된 수원시립공연단의 ‘선기대, 화성을 달리다’ 공연 모습.
무예단이 소속된 수원시립공연단의 ‘선기대, 화성을 달리다’ 공연 모습.

# 민족도장 ‘경당’과 임동규 선생에게서 시작된 수원시립무예단

무예24기는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 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해 편찬한 군용 무술교본인 「무예보통지」에서 다루는 24가지의 모든 무술을 칭한다.

무예보통지를 수련한 단체들은 국내에 여러 곳 있지만, 수원시립무예단은 2020년 작고한 무술인 임동규 선생이 만든 민족도장 경당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현재 시립무예단의 총연출을 맡은 최형국 연출 등 많은 경당 출신 무예인들이 시립무예단에 소속됐다. 

# 무예24기, 수원화성에서 선보이다

무예24기를 처음 수원에서 선보인 날은 1999년으로, 경기문화재단이 주관했던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으로 소개됐다.

최형국 연출에 따르면 수원화성이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말 그대로 돌벽만, 성곽만 있고 내용은 없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최 연출은 당시 수원화성을 지켰던 무예와 무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수원화성이라는 유형의 문화와 무예24기라는 무형의 문화를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 연출은 "그때 처음으로 수원이 관광문화도시로 성장하려면 무예24기가 수원에 정착해야 맞다고 생각했다"며 "이후 이곳에 정착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뒤따랐다"고 전했다.

# 일용직에서 정식 단원까지…쉽지 않았던 ‘시립무예단’

무예단이 정식으로 시립무예단이 된 지는 사실 7년밖에 되지 않았다. 화성 행궁이 복원된 시기가 2003년으로, 이들의 상설공연도 비슷한 때 시작됐다. 12년간 일용직으로 이곳에서 공연을 해 왔던 셈이다. 

최 연출은 당시 무예단은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2003년 상설공연이 시작된 이래 오랫동안 4대 보험도 제대로 적용받지 못한데다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다.

최 연출은 "상설 공연을 하면서 일당을 받기는 했지만, 혹한기나 혹서기에는 공연이 없어 일당을 받지 못했다"며 "단원들 대부분은 막노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고 술회했다.

단원들은 어려웠지만 무예24기의 행보는 단단했다. 2002년 월드컵 개막공연 당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무예24기의 무예 진법을 전 세계에 처음으로 공개한데다, 2004년부터 매일 상설시범을 진행하며 수원화성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최 연출은 "수원시 소속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무예를 보여 줘야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했다"며 "2011년에는 수원화성운영재단이 생기면서 시의 보조금을 받았고, 2012년 수원문화재단이 만들어지면서 재단 소속으로 들어가게 됐다"고 전했다.

# 수원에 뿌리내린 무예24기, 이제는 젊은 피 수혈 필요

수원시의 많은 관심과 무예단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제는 수원에 자리잡게 됐다. 정식 단원이 된 이후에는 걱정없이 무예 수련에만 매진했다.

문제는 자리를 잡으려고 긴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만큼 단원들의 나이가 고령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최 연출은 "현재 18명의 단원 중 10명이 20년 전부터 함께 해 왔는데, 이제는 새로운 단원들을 모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무예24기가 계속 전승되지 않으면 맥이 끊기게 된다"고 걱정했다.

현재 무예단은 태권도나 합기도 등 다른 무예를 수련하던 사람을 단원으로 들여 무예24기를 수련시키는 방향으로 충당한다. 

앞으로는 무예24기를 처음부터 수련해 무예단으로 입단케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이들의 목표다. 최 연출은 "앞으로는 무예전수관 같이 무예24기를 전수할 만한 도량을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며 "뿌리내린 식물에 꽃이 피고 이윽고 숲이 되듯, 100년 뒤에도 수원에서 무예24기 수련자가 명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립무예단은 이제 수원의 주요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잡았지만 여기서 성장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예단이 소속된 수원시립공연단의 구태환 감독은 무예24기를 어떻게 세계에 선보일지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인천 출신인 그는 처음 본 무예24기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다. 이달 무예단은 기획공연 ‘호위무사’로 그 첫발을 내딛는다.

수원시립공연단 단원들이 관무재 ‘조선의 무예를 지켜보다’를 시연하는 장면.
수원시립공연단 단원들이 관무재 ‘조선의 무예를 지켜보다’를 시연하는 장면.

# 시립공연단, 우리나라 대표 넌버벌(nonverbal) 퍼포먼스 ‘점프’의 이준상 감독 초청

구 감독의 목표는 무예24기를 주 콘텐츠로 작품을 만들어 해외에 수원과 무예24기를 널리 알리는 일이다.

그는 지난해 자신과 연이 맞닿은 공연 ‘점프(JUMP)’의 연출감독인 이준상 감독을 만나 무예24기를 시연했다. ‘점프’는 2007년 대한민국 공연 중 처음으로 누적 100만 달러의 흥행을 냈던 작품이며, 영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예술 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 초청되는 등 세계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감독은 처음 무예24기 시연을 봤을 때 해외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콘텐츠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국내의 다양한 무술이나 액션 등을 거의 보지는 못했지만, 무예24기는 보는 순간 매력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했다"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상황에서 그동안 음지에 있던 무예24기를 보여 준다면 많은 관심을 끌게 되리라 확신한다"고 전망했다.

# 목표는 영국 에든버러를 넘어 세계로…언어 장벽 넘는 몸의 공연

구 감독과 이 감독은 이구동성으로 이달 진행될 공연 ‘호위무사’를 세계적인 공연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를 위해 이번 공연은 대사가 적고 몸으로 상황을 표현하는 ‘넌버벌 퍼포먼스’로 제작됐다. 넌버벌 퍼포먼스는 대사가 아니라 몸짓과 소리로 구성된 비언어 퍼포먼스다.

구 감독은 "해외 공연이나 국내를 찾은 해외 관광객들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를 줄이고 몸으로 직접 보여 주는 넌버벌 퍼포먼스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며 "‘점프’가 해외에서 크게 성공한 이유도 넌버벌 퍼포먼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번도 무예24기를 보지 못했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통할 만한 공연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덧붙였다.

# 처음 접해 보는 콘텐츠에 단원들 팥죽땀

두 감독의 이런 시도가 처음부터 제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무예를 수련했던 무예단원들에게 ‘점프’ 같은 공연을 하게끔 연습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원들이 서로 단결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변화하는 데 도전의식을 보인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구 감독은 "경험하지 못한 훈련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단원들은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려고 연습에 몰두한다"며 "‘점프’에 참여했던 출연자들도 이번 공연을 돕고자 함께했다"고 전했다.

# 짚단 베기, 송판 격파 등 관객 환호 이끄는 다양한 퍼포먼스

이 감독은 "현재 ‘호위무사’의 완성도는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며 "관객들의 호응을 크게 이끌어 내면서도 무예24기의 모든 무술을 보여 주게끔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그는 "점프가 해외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들이 동양 무술에 경외감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점프처럼 화려한 몸의 움직임뿐 아니라 무예24기가 가진 다양한 포인트를 한곳에 모아 공연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넌버벌 퍼포먼스에 어울리는 세트도 준비됐다. 단순하면서도 한국적인 이미지를 강조해 강렬함을 주는 세트다.

구 감독은 "미취학 아동들이 봐도 웃을 만한 장면들이 포함됐고,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이 담겼다"며 "지금까지 성공했던 대부분의 넌버벌 공연들에 코미디가 담겼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달 11~12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선보일 ‘호위무사’ 스틸 컷.
이달 11~12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선보일 ‘호위무사’ 스틸 컷.

# 첫 목표는 ‘에든버러’

앞서 언급했듯 이들의 첫 목표는 영국 에든버러에서 공연을 선보이는 일이다. 무예24기 해외 진출의 교두보를 놓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이번 공연의 지속적인 발전이 요구된다.

구 감독은 "이번 공연은 어찌 보면 ‘트라이아웃’이라고 할 만하다. ‘호위무사’가 공연될 때마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발전하도록 하는 일이 목표다. 처음에는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연말에는 주요 관광 콘텐츠로 활용이 가능할 정도로 완성도를 높이고 싶다"고 했다.

이어 "올해 목표는 정조인문 테마공연의 주요 공연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일이다. ‘호위무사’ 같은 콘텐츠가 만들어져야 무예24기에 대한 관심도를 더욱 높이게 된다"고 말했다.

호위무사는 오는 11일 수원 SK아트리움에서 처음 선보인다. 이번 공연의 관심과 평가가 무예24기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백창현 기자 bch@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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