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상은 영화의 미장센을 담당하는 주요 축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특정한 색상과 맞물려 그 깊이를 더한다. 하지만 컬러영화 등장 이전까지 모든 영화는 흑백이었다. 비록 다채로운 색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강조되는 강렬한 콘트라스트만으로도 흑백영화는 단호하고 강력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무채색으로 뒤덮인 고전 영화는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 영화 속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물 표정의 미세한 변화, 작은 호흡 하나하나가 흑백영화에서 살아난다. 1943년작 ‘의혹의 그림자’는 서스펜스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으로, 평범한 일상에 드리운 먹구름을 흑백톤으로 훌륭하게 구성한 작품이다.

서로의 이름과 집안 사정을 훤히 꿰는 작은 도시 산타로사에 사는 찰리는 삶이 무료하고 따분하기만 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문득 외삼촌을 떠올렸다. 엄마의 막냇동생인 작은 외삼촌이 와 준다면 삶의 활력을 찾으리란 강한 확신마저 들었다. 때마침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외삼촌도 산타로사로 가고 있다는 전보를 보내온다. 

조카와 이름이 같은 찰리 외삼촌은 하는 일도, 거주지도 밝히지 않았지만 확실히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 집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찰리는 삼촌과 정신적으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삼촌의 작은 행동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특히 특정 신문기사를 훼손한 행동이나 선물로 준 반지 안쪽에 다른 사람 이니셜이 새겨진 점은 물음표로 남았다. 그러던 중 연쇄살인마를 쫓는 형사에게서 삼촌이 주요 용의자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찰리의 일상은 평온함과 멀어진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발생하는 위험천만한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며 찰리의 안전이 위협당한다.

히치콕 감독은 "악당은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고 영웅도 완전한 흰색은 아니다. 세상은 모두 회색이다"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영화 ‘의혹의 그림자’는 그런 감독의 생각을 반영한 작품이다. 평범한 마을에서 발생하는 불길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시종일관 모호한 분위기를 견지하며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찰리 삼촌을 연기한 배우 조셉 코튼은 전작에서 주로 선하고 신사다운 역할을 맡아 온 덕에 범인으로 확정 짓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또한 조카 찰리가 겪는 심리적 혼란과 삼촌과의 미묘한 관계 설정도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는 기제로 작용했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쌍둥이처럼 서로의 생각을 읽는 두 사람은 때론 연인으로 착각할 만큼 친밀했으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보여 줬다. 그렇기 때문에 삼촌의 범죄를 의심하며 느끼는 혼돈과 상심의 무게는 극을 이끄는 또 다른 핵심 축인 만큼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테레사 라이트의 열연이 돋보인다.

흑백영화인 ‘의혹의 그림자’는 조명을 이용한 그림자의 활용도 탁월한데, 이는 관객들에게도 의혹과 불안감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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