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 동포가 한복을 입고 참가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생활하는 모습에 반가웠다. 중국에서 조선족 동포로 생활하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우리가 간도(간토) 땅이라 부르던 만주 대륙은 우리 영토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이다. 만주에서 생활하는 조선족 동포들은 일본에 의해 만주 땅에 머물게 됐다. 대한제국 시절까지는 조선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조선과 중국 (청나라)은 국경선 관념이 없었다. 만주와 마주하는 평안도와 함경도 주민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지었다. 중국인들도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조선으로 왕래하며 구해 갔다. 

왕래가 자유롭던 조선과 중국은 1712년 국경선 합의를 한다. 고종은 해당 국경선 합의를 무효화하는 "만주 땅은 조선의 고유 영토"라는 역사성을 열거하는 국서를 중국에 보낸다.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운 것도 잘못된 것으로, 백두산도 조선 영토라는 외교 서신도 보낸다. 조선인들이 국경선을 넘나들자 중국은 경고하며 나서지만 조선은 강력하게 항의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888년 조선과 중국의 통상 회담으로 국경선 문제는 확정 짓지 않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조선은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안전을 위해 관인들을 파견해 보호에 나선다. 1909년 국권을 일본에 강탈 당한 후 일본과 중국의 간도협약에 의해 만주 땅은 중국으로 편입되면서 조선 동포들은 그곳에 발이 묶이게 된다. 조선족자치구가 생기면서 중국은 동포들을 조선족이라 불렀다. 

일제시대에도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충의대·진위대 등을 조직해 활동하다 통합해 독립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동포들은 적은 돈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건네기도 했다. 

만주에서 생활하던 동포들은 갖은 핍박과 서러운 생활을 해야 했다. 중국 옷을 입고 중국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이 계속됐지만 동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귀화하라는 압박, 불법 과세, 감금, 재물 강탈 등으로 불만이 쌓이면서 동포들은 크고 작은 자생단체들을 모아 만주지역 조선회 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호적 정리, 교육, 사회사업 등으로 동포들의 권익과 친목에 나섰다고 한다. 

청나라가 망하고 불교 용어와 연원이 있는 만주를 국호로 사용하는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동포들은 생활의 자율성과 안전이 보장된다. 만주국은 중국 공화국과 절연하고 독립한다. 타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건국선언서 발표로 동포들은 개선된 생활환경에서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생활해 올 수 있었다. 

동포들도 흰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에서는 백의를 입지 말라고 했으나 일반 민중들은 언제든지 흰 한복을 고수해 왔다.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서도 흰 한복은 생활복이자 예복이었다. 선·형·색 세 가지 요소를 갖춘 한복을 고치고 꿰매고 세탁해 구김은 다듬이와 인두로 펴서 정갈하게 입으셨다. 

남녀의 한복 목 부분 옷깃에는 반드시 흰색의 옷감을 댄다. 이것을 동령 또는 동정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표상을 나타 내고 있는 것이다. 동령의 흰색은 백두산을 상징하고, 동령은 동방 민족임을 어엿하게 표하는 것이라 했다. 중국은 우리의 한복이 이런 심오한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개막식에 입고 나온 조선족 동포의 한복 차림 모습에서 쾌연함을 가질 수 있었다. 동이의 문화권에 있었던 중국이 중국 영토에 있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들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는 가당치 않으며 예의와 염치가 없는 행동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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