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때로는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불쾌하기도 하고, 원망도 하며 사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는 네 뜻대로 살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쾌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올라온다는 것은 곧 내가 무언가에 구속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주 속의 성자들」(김윤덕 저)에 노예제가 미국 북부지역에서만 폐지된 상황에서 거의 죽어가는 몸이 돼서도 북부로 탈출한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북부는 링컨을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 노예제가 폐지됐습니다. 미시시피강 중류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립하던 지역이 있었는데, 전쟁 일보 직전이라 그런지 양측의 경계가 매우 삼엄했습니다. 남부의 많은 흑인 노예들이 강을 건너 북으로 탈출하곤 했는데, 대부분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군의 총격으로 죽거나 총상을 입었습니다.

어느 날, 한 흑인이 강을 건너다가 등에 총을 맞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강을 건넜고, 그를 구출한 북군이 안타깝게 여기며 "대체 당신 주인이 얼마나 혹독하게 했길래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려고 했소?"라고 물었더니, 그는 "주인님은 인자하고 정이 많았어요. 매질 한 번 하지 않았거든요. 저희를 늘 배불리 먹여 줬고, 좋은 잠자리도 주셨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았는데도 탈출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병사에게 그는 "자유 때문이에요. 이곳에 오면 자유인이 된다고 들었거든요"라고 말하고는 이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유가 무엇이길래 그는 죽어가면서까지 가지고 싶어 했을까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곧 자유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라고요. 이야기 속 주인공은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고, 우리 역시도 ‘명예’와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저자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직장인들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는 사표다. 당장 힘들어 그렇지 조금만 돈이 모이면 이놈의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저도 한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것도 온종일 일에 시달려 축 늘어진 어깨를 간신히 지탱하며 집으로 올 때마다 얼마나 자주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사표를 내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유로이 홀로 선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또는 가족이 마음에 걸리고, 새로운 세상이 무척 거칠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저자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알에서 부화할 때부터 새장 안에서만 자란 새는 다 자란 다음, 새장 문을 열어 줘도 날아가지 못한다. 나는 법이야 알련만 어디로 가야 할지 자유를 알지 못하기에 몇 번 날갯짓하며 그저 몇 미터 상공에서 퍼덕거리다가 다시 새장 근처로 와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린다. 혹 근처 나뭇가지에 앉는다 해도 그대로 두면 결국 금방 죽어 버린다. 갇힌 삶에 익숙해져 혼자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다."

자유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새장 안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주인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유가 아닌 창살이라는 구속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로 나를 구속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집착하고 있는 것이나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들이 혹시라도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숙고해 보는 시간이 가끔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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