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국 인하대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교수
백승국 인하대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교수

평생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의 다양한 사건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2018년 10월 14일 영국 국회의사당 엘리베이터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44살의 영국 이민국 장관 제임스가 28살의 여성 보좌관 올리비아를 강간하는 섹스 스캔들이 벌어졌다. 

영국 총리의 절친이자 보수당 지지자의 절대적 신뢰를 받는 제임스 장관이 저지른 충동적 행동으로 영국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악용해 5개월 동안 불륜 관계를 유지했고, 원초적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섹스 폭력에 영국인들이 분노했다. 이 섹스 스캔들은 넷플릭스가 2022년 4월 15일 개봉한 영국 드라마 ‘아나토미 오프 스캔들’의 핵심 줄거리이다. 

흥미로운 장면은 법정에서 벌어진 호칭에 관한 논쟁이다. 검사는 피해자에게 장관님이라고 호칭했는지 혹은 이름을 불렀는지 확인한다. 또한 어느 시점에서 장관님이란 호칭 대신에 이름으로 호칭했는지 확인하고,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를 설정하는 장면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칭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군림했다. 이름 앞뒤에 붙이는 호칭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가늠하는 문화를 조성했다. 호칭의 사전적 정의는 화자가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하는 지칭어이고 이름 호칭어, 직함 호칭어, 친족 호칭어, 대명사 호칭어로 구분한다.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과거 추미애 씨라고 호칭한 것이 재조명 받았다. ‘추미애 씨 한동훈 장관님 해 보세요’라는 언어유희의 댓글도 화제가 됐다. 유독 한국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풍경으로, 공직을 떠나는 순간 호칭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상징적 장면이다. 어쩌면 장관님이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박탈감에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군인과 성직자의 호칭을 상징하는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호칭이 시대의 권력과 야망을 표현하고 있으며, 호칭은 한 사람을 포장하는 장식품인 동시에 보호하는 성벽과 같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권력과 지배력을 과시하는 상징적 자본이다.  상징적 자본은 돈으로 획득하는 자산이 아니라 명예, 평판, 인지도로 만들어진다. 상징적 자본은 사회구성원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명예와 권력이다. 호칭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이고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호칭을 내려놓는 것은 권력을 박탈당하고, 타인의 신뢰를 상실한다는 감정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호칭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호명(interpellation) 이론’을 연구한 사회철학자 알튀세르는 타인이 자신을 호명하는 순간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호칭은 계층과 집단을 구별하는 잣대를 넘어 타인의 생각과 관념을 주입하는 언어 장치이다. 그래서 국가, 종교, 학교, 기업, 정당에서는 무의미한 호칭을 끊임없이 만들고 의식을 통해 배포하고 있다. 호명을 통해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고,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최근 MZ세대들은 기업의 수직적 직급과 호칭을 거부하는 새로운 문화를 도입하고 있다. 그들은 직함 호칭을 경멸하며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 실력으로 평가하는 공정한 조직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MZ세대는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의 의미를 거부한다. 2022년 그들은 위대한 사람의 호칭을 꿈꾸지 않으며, 죽은 후의 호칭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다. 오직 생전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누리는 즐거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 어쩌면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를 조성하는 비밀의 열쇠는 호칭이 사라지는 수평적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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