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금은 알려졌던 중앙 문학지에 작품을 내고 등단이라는 명예를 얻은 지도 30년이 지나간다.

욕심처럼 시, 수필, 아포리즘, 단편소설, 동화, 동시 등을 마구잡이로 써 보고 시답잖은 책도 몇 권 냈지만 여전히 쓰기 어려운 것이 동화나 동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적이고 물욕만 넘치는데,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심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다. 

과거 전파견문록이라는 어린이 프로를 자주 봤다. 어린이들의 재치에 감탄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린이가 설명을 하고 어른들이 그 설명에 맞는 단어를 맞히는 것인데 아빠가 제일 크고 그 다음이 나이고 엄마가 제일 작아요(방귀), 아빠가 일어나면 엄마가 책을 봐요(노래방)하는 데는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재산으로 여겼던 지식이나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밖의 세계 그것이었다. 

"욕심이 없으니 고졸(古拙)할 수밖에, 동심이 있으니 유치원생이나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나이 낙서 같을 수밖에, 또 무아에서 뛰니 생명감이 철철 넘칠 수밖에" 삼성출판사의 대표께서 중광의 그림을 보고 평한 글이다.

성인들은 유치(幼稚)하다 하면 좀 뒤떨어지고 모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유치원의 유치와 같은 단어다. 순진무구(純眞無垢)란 마음이 티 없이 꾸밈이 없고 참되다는 최고의 단어이며, 천진난만(天眞爛漫)이란 말이나 행동에 아무런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매우 순수하고 참되다는 단어다.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이젠 잃어버린 고향처럼 그립고 이슬처럼 깨끗한 단어들이 아닌가.

어렸을 때 우리는 모두 순진하고 천진했다. 지금처럼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았다. 회상하면 그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았는가.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았고 두려움도, 욕심도 없었던 어린 시절이 어찌 그립지 않은가.

중광의 그림에 "예술 혼을 뛰어넘는 예술", "언어 이전의 시"라는 찬사와 "유치하다", "유치원 어린애 그림 같다"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유치하다는 것은 혹평이 아니라 찬사가 아닌가 한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동심을 탐욕에 찌든 세상에 허덕거리는 그 어떤 성인이 그릴 수 있을까. 어른이 어른다운 작품을 그리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의도된 동심은 그려 낼 수 있겠지만 진정 어린이가 돼 순진무구한 동심을 그려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광의 달마 또한 거침없는 몇 번의 붓질로 쓱쓱 그려 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 해 과거의 형식과 율(律)을 걷어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작품이다. 무심히 그려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그린 달마다. 누운 달마, 술 취한 달마, 눈동자가 두 개씩인 달마, 성기를 내놓은 달마, 외눈 달마, 면벽달마 등 그동안의 틀과 형식을 완전히 혁신한, 말하자면 화법을 배웠을 리 없는 어린이들이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그린 천진하고 무구한 무상(無相)의 자신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나이가 들수록 동화나 동시는 쓰지 못하겠다. 점점 어린이들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줄 안다. 그동안 어른이 어린이 흉내를 내어 보인 작품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본인이 순진하지 않고서는 순진한 작품을 만들지도 못하겠지만 만들려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중광은 순수한 백지에 유치와 순진을 채웠다. 그에겐 어두운 먹조차 천진했다.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그의 진작(眞作)을 감상하며 열심히 그의 기행(奇行)을 좇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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