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 장르에 대한 대중의 생각은 남녀 간에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는 감상주의적 스토리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진부한 전개로 점철된 낡은 이야기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멜로드라마는 한국 영화 시장의 주류 장르로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영자의 전성 시대’, ‘별들의 고향’,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멜로영화의 고전이고, ‘8월의 크리스마스’,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등은 1990년대 멜로드라마 장르의 황금기를 이끈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 ‘슬픔은 그대 가슴에’, ‘사랑할 때와 죽을 때’와 같이 제목만 보아도 신파 느낌이 강한 영화를 연출한 더글러스 서크는 195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멜로드라마 감독이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서크 감독은 통속적인 사랑이야기는 전면에, 사회적 문제는 배경에 둘러놓는 방식으로 에둘러서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의 대표작 ‘바람에 쓴 편지(1956)’는 치정극의 외양 안에 자본주의 속 정신적 빈곤과 올바름으로 포장된 위선을 꼬집은 작품이다. 석유재벌의 후계자인 카일은 남아도는 돈과 시간으로 방탕한 날들을 보낸다. 물질적인 배경이 제공한 당당함과는 달리 카일의 내면은 소꿉친구인 미치로 인해 늘 주눅 들어 있었다. 똑똑하고 성실해서 카일의 아버지조차 아들보다 더 신뢰하는 미치는 카일의 뒤치닥거리도 깨끗하게 처리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내였다. 그런 두 사람이 지적이고 아름다운 커리어 우먼 루시에게 한눈에 반한다. 재력을 앞세워 자신을 어필하는 카일과는 달리 미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루시를 바라봤다. 현명한 여성이라면 요란한 물질공세에 휘둘리지 않을 거란 믿음과 함께. 기대에 부응하듯 루시는 값비싼 선물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카일의 진심에 감동해 청혼을 받아들인다. 결혼 후 개과천선한 카일은 술도 끊고 착실하게 생활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 후 그 괴로움에 다시 술을 찾는다. 한편 오랫동안 미치만을 바라본 카일의 여동생 메릴리는 미치의 마음이 새언니에게 향해 있음을 알게 된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석유재벌 가족은 가질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갈망으로 행복과 멀어진다. 미치처럼 듬직한 아들을 원하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인정도 받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카일.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미치. 미치를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메릴리.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바라는 루시. 영화는 원하는 사랑과 상황을 얻을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을 통속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펼쳐 놓은 스토리를 따라 감정 이입하고 그 상황에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오락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 비판적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 영화는 정신적 빈곤함이 야기한 오해와 불신이 인물 간의 갈등을 낳는데, 이때 ‘정상적’ 혹은 ‘반듯함’이라는 획일화된 기준이 파멸의 씨앗을 양산한다. 이와 함께 돈과 권력을 향한 위선적인 욕망은 루시와 미치가 가족에 합류하는 모습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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