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시인)
문계봉(시인)

 5월이 시작되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었습니다. 햇수로 3년 만에 우리는 온전히 얼굴을 드러내고 서로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표정에 담긴 이미지의 언어를 읽을 수 없어 의미 있는 소통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는 환한 미소를 상대에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마스크는 친밀한 교감을 방해하는 하나의 차폐물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마스크를 벗는다는 건 의미 있는 소통이 이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코로나 시대의 마스크는 비단 우리의 코와 입만을 가린 게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간 우리는 생활의 모든 부면에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마스크를 덧씌워야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람과 사물의 관계, 조직과 구성원의 관계, 예술과 (그것의) 향유자와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등 삶의 본질적인 영역에서부터 실제적인 영역까지 강제로 덧씌워진 마스크로 인해 제대로 된 소통을 방해받고 단절을 강요당해 왔던 거지요. 이제 그 방해와 단절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직은 마스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닙니다. 여전히 바이러스는 우리 주위에 엄존하고 그 위험성 또한 한결같습니다. 실생활에서의 마스크는 여전히 우리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미세먼지 때문에라도 마스크는 필요합니다. 마스크가 자신은 물론 타인을 위해 배려이자 안전장치가 되는 경우는 적지 않을 겁니다. 마스크가 최소한의 안전을 지켜주는 안전 도우미인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떨쳐버리고 싶은 건 실제적인 효능이 있는 마스크 자체가 아니라 앞서 말한, 우리 삶에 드리워진 ‘강제된 마스크’라는 상징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소통을 방해하고 본 모습을 은폐하며 사람들의 모든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장애의 상징으로서의 마스크’를 부정하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어 감염병 확산과 화생방 상황에서 착용하는 마스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강도와 절도범의 마스크는 자신을 은폐하여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경계하는 건 바로 후자의 경우처럼 소통의 단절, 공격성의 은폐, 신분의 위장이라는 마스크의 상징일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후자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의 빠르고 완전한 회복이겠지요.

 하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학생들은 여전히 교실에서 마스크를 쓴 채 수업해야 할 겁니다. 예술가와 관(람)객들의 만남도 완전히 복원되진 않았습니다. 50인 이상 야외 모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하고, 경기장에서도 마스크를 쓴 채로 응원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는 언제든 새로운 변종으로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승리를 이룬 게 아닙니다. 병원에 입원 중인 위중한 환자가 아직도 수백 명이고 하루에도 100여 명 가까운 확진자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경계심을 늦출 때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을 기점으로 희망을 지녀볼까 합니다. 우리 삶의 곳곳에 드리워진 단절의 상징인 마스크를 벗겨내고 의미 있는 소통을 재개하고 싶습니다. 마스크를 벗어 던진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5월의 훈풍처럼 얼어붙었던 교실을 녹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들의 예술을 선보이고 그들의 반응과 참여 속에서 시너지를 얻어 새로운 예술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예술가들의 환한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제 반쪽짜리 표정이 아닌 온전한 표정으로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과, 힘든 과정을 함께 겪은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연대와 공감의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했던 모든 것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숨을 고르는, 평범한 아름다움의 시간이 앞당겨지길 간절히 소망해 보는 5월입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