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을 진지하게 이해할 때 "왜 다큐로 받아들여?"라는 말을 쓴다. 그만큼 다큐멘터리 장르는 대중에게 재미보다는 진중한 작품이란 인식이 강하다. 허구가 아닌 사실의 기록인 다큐멘터리는 관찰과 기록의 미학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 실재 속에 가려진 진실과 세상을 향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TV 다큐멘터리 연출자로 출발했다.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의 불편한 곳을 정면으로 응시한 감독은 극영화로 전향한 후에도 세상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각도로 그려 내는 데 집중한다. 2004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감독의 역량을 세계에 알린 첫 번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엄마 ‘유’는 올망졸망한 아이 네 명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새집에 이사 온 아이들은 엄마와 약속한다. 집에서 떠들지 않으며 집밖은 물론이고 베란다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엄마는 집주인에게 12살 큰아들 아키라만 소개한다. 아이가 많으면 여러 민원이 들어와 쫓겨나기 때문이었다. 빨리 철이 든 네 아이는 제한된 공간에서 집안일을 분담하며 얌전히 잘 지냈다. 엄마가 가출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에 돌아올게"라는 쪽지와 생활비를 두고 간 엄마는 이전에도 출장을 핑계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엄마가 머지않아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둘째 딸 손톱에 칠한 붉은 매니큐어가 다 사라질 때까지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12살 장남 아키라는 가진 돈으로 악착같이 버텨 보려 애썼지만 아이들의 삶은 허물어져 갔다. 작지만 포근했던 집 안은 쓰레기로 뒤엉켜 엉망이었고, 급기야 전기와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극단적인 환경에 이르자 아이들은 오히려 밖으로 나갈 명분을 얻었다. 공원 화장실을 이용하고 분수대에서 세수, 양치, 빨래를 하며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월은 길었다. 결국 막내가 사고를 당하지만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도쿄에서 발생한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재구성된 작품이다. 아버지가 다른 네 아이들은 설상가상으로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영화의 큰 흐름은 실화를 따르지만 이 작품은 사건 재연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 없는 부모나 아이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음에도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이웃을 표적으로 삼아 감정적 공분을 일으키는 방식도 취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장기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기보다는 그 사정을 헤아려 보려 하고, 나름대로 생활의 지혜도 터득하며 아이들은 커 간다. 

아이들이 발산하는 낙천적이고 밝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는 결국 비극을 낳는다. 관찰자 시점에서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는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을 보호할 근본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검은 화면이 나타나며 영화는 끝이 나지만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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