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최근 한 독서모임에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연이어 읽었다. 두 여행기는 18세기 후반 동서양의 두 지식인이 당시 동서양의 문화적 중심지를 여행한 견문록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마흔네 살이던 1780년 5월에서 10월까지 6개월 동안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 북경과 열하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3년 후에 편찬한 글이고,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가 서른일곱 살이던 1786년 9월부터 1788년 4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등지를 여행한 후 30여 년이 지난 1816년에 1부를, 그로부터 다시 13년이 지난 후인 1829년에 2부를 완성한 글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선비 박지원의 중국 여행과 독일의 작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요즘 말로 치면 ‘버킷리스트’에 해당할 만한 것이었다. 별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이미 많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국에 다녀온 것을 부러워했을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에게, 삼종형 박명원이 사절단 대표가 되고 그 사절단의 군관자제 자격으로 청나라 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은 실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십대 중반에 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타게 된 괴테는 10여 년간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초빙돼 정치적 입지를 다진 상태에서 주변 몰래 이탈리아 여행길에 나서게 됐다. 

당시 문물의 중심지인 청나라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연암 여행의 주된 동기였다면, 이미 부와 정치적 명성까지 갖춘 괴테가 도망치듯 여행에 나서게 된 것은 그러한 정치적 성공으로 인한 문학적 상상력의 고갈에 대한 위기감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즉 일상에서 탈피하려는 갈망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당도했으나 황제가 휴가 차 열하에 가 있어 급히 열하로 이동하게 된 일은 사신단에게 고단한 강행군이었으나 연암에게는 뜻밖의 행운이기도 했다. 연암은 청나라의 벽돌과 수레 등의 문물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 효용성을 꼼꼼하게 살폈으며, 처음 접한 약대(낙타)와 코끼리에 대해서도 탁월한 문장으로 묘사했다. 요동 벌판에 이르러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통곡할 만하다"라고 외치는 호탕함, 중국 제일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다는 일갈은 조선 후기 실학파의 거두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연암은 중국 여행 중에 누군가에게 듣고 어디서 본 것처럼 「양반전」과 「호질」, 「허생전」 이야기를 펼치는데, 이는 연암의 창작으로서 당대 사회를 꿰뚫어 보는 지식인의 비판적 안목이 녹아 있다.

이탈리아의 베로나,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를 거쳐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괴테의 여정은 유럽 문화의 정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괴테는 고대 로마의 건축과 유적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작품 등에 대한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괴테 스스로도 그림을 그렸지만, 서양문화사를 꿰뚫고 있는 안목을 보여 줬다. 그런가 하면 나폴리 인근의 베수비오 화산에 세 번씩 오르며 "이 기묘한 것을 내 눈으로" 보려는 강한 호기심을 쏟아내기도 했다. 또한 여행 중 자신의 산문 「이피게니에」를 개작했고, 「에그몬트」를 완성했으며, 평생에 걸친 역작 「파우스트」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보복 여행’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여행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18세기 두 지식인이 당대 사회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것처럼 의미 있는 여행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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