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은 작가가 지난 7일 인천시 연수구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BODA갤러리에서 자신이 작업한 ‘Pinky Porky’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재은 작가가 지난 7일 인천시 연수구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BODA갤러리에서 자신이 작업한 ‘Pinky Porky’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녹색 수술 가운을 입은 한 사람이 수술대 위 돼지의 배를 가른다. 조명 아래 누운 돼지는 처음 그 모습이었던 것처럼 속이 비어간다. 돼지의 ‘머리, 어깨, 무릎, 발’은 형체 없이 으깨진다. 그 머리는 ‘케이크’처럼 썰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다.

녹음이 무성해지기 시작한 6월 초입,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BODA 갤러리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낯선 이미지들이 나열됐다. 도축된 돼지의 속이 비어 가는 과정은 하얀 패널 위 연속적인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났고, 전시실 안쪽에는 정육 분쇄기에 갈려 나가 곤죽이 되는 모습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그 사이에는 곧 죽어 발골될 돼지 한 마리가 인간과 닮은 눈을 깜빡인다.

이 전시는 신재은(38)작가의 GAIA 시리즈 중 하나인 ‘Pinky Porky’다. GAIA 시리즈는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전 지구적 관점으로 시야를 넓혀 지구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상상해 본 작업이다. 

작업에는 공장형 가축인 돼지가 중심 소재로 사용됐다. 작가가 수많은 가축 중 돼지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과 돼지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돼지는 지표면을 주체적으로 활보하는 인간과는 다르게 공장에서 나고 자라 행동반경까지 통제받으며 수동적 삶을 살아가고, 때에 따라서는 잔인하게 살처분되기도 한다. 

신재은 작가의 ‘Pinky Porky’ 작업 과정을 촬영한 사진 중 일부.
신재은 작가의 ‘Pinky Porky’ 작업 과정을 촬영한 사진 중 일부.

신 작가는 "인간은 돼지를 개와 고양이, 소와 달리 고깃덩이 혹은 음식물쓰레기나 인분 등 더러운 것을 처리하는 존재로 멸시하며 하등하게 여겨 왔어요. 하지만 돼지의 유전체와 장기의 구조는 인간과 비슷해서 바이오 장기 이식에 사용되기도 할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작가적 시선에서 대자연이 부여한 패턴과 질서에 따라 미지의 곳을 향해 흘러가는 인간의 삶과 자유 없는 공장 돼지의 삶이 비슷해 보였습니다"라고 작품 소재를 설명했다.

신 작가는 그동안 문명의 외피 아래 감춰졌던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Pinky Porky’ 역시 인간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공간에 분리돼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가공되는 낯선 풍경을 드러낸다. 

그는 "살처분 현장이 나오는 뉴스에서 마치 씨앗처럼 땅에 묻히는 돼지들을 보며 기괴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면서도 시스템적으로 반성하며 여러 질문을 하게 됐어요. 인간과 닮은 돼지지만 위계질서에서 상위와 하위에 있는 점은 은유하고 싶었어요. 돼지를 해부하는 장면도 사람처럼 보이게끔 하고 싶었죠. 그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불쾌감이나 죄책감 같은 다양한 감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인간도 대자연의 질서와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돼지처럼 지구에 사는 생물의 한 종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_, FHD single channel video, 10sec, 2021.
어쩌면_, FHD single channel video, 10sec, 2021.

신 작가는 "멀리 밀쳐 내고 덮어 뒀던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을 끄집어내 직시하는 현실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진보적 변화가 시작되리라는 기대를 하며 작업했어요. 돼지가 식품으로서 유통되는 과정이 기록된 각 작품들은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돼 절대자처럼 자유 의지와 이성적 논리로 독보적인 질서를 만들고 돼지로 은유된 자연적 본성을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양 묘사됩니다. 과연 인간이 돼지와는 다르게 자유 의지를 가졌는지, 그리고 이성적 존재인지 반문하며 작업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이 같은 통찰은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 인간이 감행한 행위에서 소외되거나 은폐된 병폐는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왜곡된 인지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문명이 발전하려면 인간 본연의 민낯을 직시해 수긍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기초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다큐멘터리적 형식을 차용하거나 변용해 작품을 제작한다. 영상 작업뿐 아니라 입체 작업과 설치,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대자연 속 인간이라는 종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도록 서사를 만들어 낸다. 문명의 일상에서 단절시켜 낯설게 느껴지는 시공간과 존재 혹은 억눌렸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조명한다. 다큐멘터리적 형식은 오히려 사실을 비현실적 판타지처럼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으며 인간이 자아를 분리해 의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장치로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고 인공적 위계 관계를 형성하며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 여겼던 인간의 노력에 시비를 따지고 위선을 꼬집는다.

침묵의 탑 pink_, 돼지 사체, 흙, 시멘트, 아스팔트, 800x800x3000mm, 2018.
침묵의 탑 pink_, 돼지 사체, 흙, 시멘트, 아스팔트, 800x800x3000mm, 2018.

인공의 화단에서 발견되는 네잎 클로버를 채집하는 퍼포먼스 설치 작업인 ‘네잎 클로버가 있는 언덕(2016∼2017)’과 그것의 기형 종자를 집단으로 재배한 설치작품인 ‘안젤라 연구소(2017∼2018)’를 통해 행운을 염원하는 인간의 허망한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논리 저변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맹목성을 살펴봤다.

또 돼지의 사체를 뒤덮는 지층을 수직으로 구축하고 아스콘층으로 표면을 장식해 살처분 상황을 재연한 작품 ‘침묵의 탑pink(2018)’에서 시작되는 GAIA 연작 시리즈(2018∼2020) 역시 현대 문명 속 다른 생명 통제를 당연시하며 생명 간의 위계를 세워 폭력을 행사하는 야만적 행위를 냉소적으로 고발하고 인간의 본성을 고찰한 작업이었다.

이 중 GAIA 연작 시리즈는 신 작가가 인천에 뿌리를 내린 뒤 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2016년 인천문화재단 바로그지원으로 인천과 인연을 맺고, 2018년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역에 정착했다. 이듬해부터는 동구 주단거리에 작업실을 두고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신 작가는 "GAIA 시리즈를 인천에서 시작했는데 매립된 땅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돼지가 매립되는 장면을 보기도 했지만 바다를 매립해 땅으로 만든 인천에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습니다. 인천은 재료를 구하기도 쉽고 작가 간 유대도 끈끈해 활동하기가 좋아요. 설치작품 중에는 대형 조형물도 있어서 작업실이 1층이어야 하는데 금전적인 측면에서도 부담이 적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했던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입주기간은 작품 구상과 개념을 확장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 레지던시는 청년작가들이 어려워하는 홍보와 교류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청년예술가들이 전시를 하고 활동을 이어나가려면 자신을 알려야 하는데 그 방법을 찾기가 처음에는 어려운 듯싶어요. 또 어떤 주제로 작품을 해 나갈지,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혼자 찾아가기가 힘들어요. 결국 작가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교류하면서 확장시켜 나가야 하죠. 재단을 통한 예산 지원이나 홍보, 전문가 매칭, 법률 상담 등 다양한 측면의 지원도 도움이 됐어요"라고 했다.

10년 이상 활동을 이어온 신 작가는 인천지역 청년예술인들에게 필요한 지원으로 작품을 발표할 충분한 공간과 장비 대여 매칭, 평론 지원, 기획자 매칭 등을 꼽았다. 특히 젊은 기획자와 예술가를 매칭하면 고민거리인 홍보 문제도 해결하고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 작가가 성장하는 기회도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술가로서 ‘자립’에 대한 고민도 털어놨다. 그는 "지원금이 있으면 큰 규모의 작업이 가능하지만, 의존하다 보면 지원금 없이는 작은 작품만 할 수밖에 없어요. 보통 청년예술가들을 보면 재단 지원을 받아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끊겼을 때 자립을 어떻게 할지는 개인의 몫이죠. 저 같은 경우는 강의를 나가서 수입을 보충하기도 하고요. 예술활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여의치 않으면 지금 내가 할 만한 활동을 먼저 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경험을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신 작가는 당분간 GAIA 시리즈를 이어가겠다고 했다. 전시장 입구에 수제 소시지숍을 차려서 관객들이 소시지를 먹다가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작품들을 보는 구상을 완결 짓고 싶기 때문이다. 셰프가 음식물쓰레기 부산물로 만드는 사료를 먹은 돼지의 창자를 이용해 음식물쓰레기 소시지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눈앞에 놓인 소시지를 씹고 소화시키며 돼지와 인간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도록 완결을 짓고 싶은 소망이다.

신 작가는 "지금까지 거대한 목표를 의도적으로 세우고 작업을 하기보다, 당시 삶에서 저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문제들의 근본을 파고들며 도출해 낸 결과들을 눈앞에 끄집어내 확인했어요. 머릿속에 맴돌던 모호한 이미지를 조각하듯 정교한 형상으로 깎아내며 실체를 뚜렷하게 가시화하면서 즐거움을 느껴 왔습니다. 앞으로 어떤 관점이나 관심사로 변화될지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파고드는 행위를 지속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를 둘러싼 세상의 근원과 본질을 이해하고 확인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 신재은 작가 프로필

조소를 전공했고 2012년 첫 개인전 ‘좋은 곳’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각 작업마다 필요한 매체를 다양하게 융·복합적으로 사용하며 설치 작업을 해 왔다.

2012년부터 2018년까지는 주로 유사과학 상품을 소재로 한 작업-2012년 작 ‘좋은 곳’, 2017년 작 ‘Berry Buffet’, 그리고 미신을 소재로 한 작업-2012년 작 ‘길몽’ 시리즈, 2014~2015년 작 ‘호황 프로젝트’와 ‘애정운 상승 프로젝트’, 2016~2018년 ‘㈜안젤라연구소’ 시리즈 등 강렬한 무의식적 욕구와 감성에 의한 행위를 논리와 이성으로 포장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2019년 작 ‘Sink Sank Snunk’와 2019년 작 ‘CRUSTAISM’, 2018년 작 ‘HOP HOP’, 2018~2021년 ‘GAIA’ 시리즈 등 최근에는 관심사가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됐다.

인류 문명의 유위적 표피에 감춰졌던 자연의 본성과 무위적 질서를 표면으로 노출시켜 인간의 민낯을 바라보는 작품들을 발표하는 중이다.

2018년 이후로는 공간 고유의 특성과 구조를 비롯해 공간 속 관객들의 동선, 관람 위치 등의 요소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는 설치 방식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각이 아닌 작품과 공간 그리고 관객이 하나의 관계망 속에 얽히도록 구성해 ‘대자연 속의 작은 구성원인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조형화한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사진=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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