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밉상’, ‘희대의 악녀’와 같은 수식어로 미디어에서 자신을 언급한다고 생각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집 앞에는 취재진이 가득하고, 자신과 아주 작은 인연이라도 있었던 사람들 모두를 찾아내어 과거의 잘못 하나하나를 들춰내 보도한다면 어떨까?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들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거라면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1994년 폭력적인 사건에 연루돼 빙상연맹에서 영구 제명된 미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이 그런 케이스다. 토냐는 미국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켜 1991년 당시에는 ‘국민 영웅’, ‘은반 위의 요정’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불과 몇 년 만에 바닥으로 추락한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영화 ‘아이, 토냐’가 담아냈다. 

1970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토냐 하딩은 4살 때부터 스케이팅에 소질을 보였다. 정식 훈련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 만큼 토냐는 남다른 떡잎이었다. 토냐의 기량이 높아질수록 그녀의 또 다른 면모에도 이목이 집중됐다. 바로 천박함이었다. 토냐에게는 피겨 선수의 중요 덕목인 우아함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딸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토냐에게 올인했지만 그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토냐 또한 입과 행동이 모두 거칠었다. 비싼 의상비를 감당할 수 없어 직접 만들어 입은 피겨복에는 남모를 정성과 억척스러움이 녹아 있었지만, 심사위원과 관객들이 보기에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싼티나는 복장일 뿐이었다. 이렇듯 토냐는 여러모로 미국을 대표할 만한, 미국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이 호의적이었던 순간은 바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켰던 1991년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얼음 위로 뛰어올라 3회전 반을 돌 때 세상은 그녀에게 환호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가정학대를 피해 자신을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는 남성을 만났다는 믿음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한 토냐는 그러나 또 다른 폭력과 마주해야 했다. 결국 폭력적인 행동을 사랑이라 정당화하는 남편과 결별하고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둔 어느 날, 토냐의 운명은 다시 한번 수렁에 빠진다. 라이벌 선수가 괴한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사건의 배후로 토냐가 지목되면서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악녀로 떠오른다. 

일명 ‘토냐 하딩 사건’으로 불리는 라이벌 선수 청부 폭행 사건과 관련해 토냐는 관여한 바가 없었다. 다만, 수사가 진행되기 전 진실을 알았음에도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영구제명으로 물게 됐다. 그렇다면 ‘국민 악녀’ 프레임은 어째서 아직도 공고한 것일까? 비록 현재의 우리가 당시의 토냐를 오해하고 맹비난하는 데 한몫하지는 않았더라도 지금의 우리도 미디어를 통해 또 다른 희생양을 죄책감 없이 만들며 분노를 쏟아내는 중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도 맥없이 쓰러지기보다는 뛰어오르는 것을 선택한 토냐는 피겨 은퇴 후 격투기 선수로 생활하다 현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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