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부평구 금마산 중턱에 자리잡은 ‘칠성약수’는 인천 도심을 굽이굽이 가로 질러 한강에 도달하는 어느 한 물줄기의 발원지다.

 태백산맥을 지나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굽이쳐 황해로 흘러 드는 남한강의 발원지인 ‘태백 검룡소(太白 儉龍沼)’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조그마한 약수터에서 흘러 나온 그 물줄기는 오랜 시간 부평과 계양의 들녘과 김포의 평야지대를 지나며 우리 지역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바로 ‘굴포천(堀浦川)’이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 등 역사의 부침 속에서 굴포천은 급격한 도시 팽창과 산업화라는 큰 파도에 콘크리트로 덮혀지고 물은 오염돼 제 모습을 찾기 어렵게 돼버렸다. 

 하지만 굴포천은 과거 긴 시간 50리를 북류(北流)하며 우리 고장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이자, 어부들의 천렵(川獵) 터이자, 농민들의 관개하천(灌漑河川)으로 존재해왔다. 최근 부평구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추진되면서 굴포천이 ‘자연생태하천’으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되찾는다.

 가까운 미래에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부평지역 주민을 비롯한 모든 시민들은 도심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새로운 모습의 부평을 만나게 되리라 기대된다.

 부평지역에서 발원한 굴포천의 역사와 함께 굴포천을 새로운 지역 명소로 만들기 위한 시민과 지자체의 노력이 눈물겹다.

지난해 6월 본격 착수한 인천 부평구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 사업 비교 조감도.
지난해 6월 본격 착수한 인천 부평구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 사업 비교 조감도.

#굴포천, 그 이름의 유래와 역사

 유역면적 124.5㎢, 길이 11.50㎞인 굴포천은 지방하천으로는 인천지역에서 가장 길다.

 1698년 ‘부평부읍지’에는 ‘대교천은 도호부의 동쪽 칠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원래 원적산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직포(直浦)라 하고, 김포군 일대를 지날 때는 굴포(堀浦)라 부른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굴포천 이름의 유래는 멀리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 중 마한국과 함께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는 ‘굴’이란 단어가 ‘매우 크다’ 혹은 ‘매우 깊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이 하천의 지천은 산곡천, 세월천, 청천천, 동수천, 목수천, 들내, 삼정천, 계산천, 여월천, 귤현천 등이 있으며 양 옆에는 농수로로 쓰이는 간선천이 흐른다.

 고려와 조선에서 ‘굴포’라는 단어는 ‘흙을 파내어 만든 개울’이라는 뜻을 지닌다. 현재 굴포천의 상류에는 도심지가 형성됐고 하류에는 김포평야가 펼쳐졌었다.

 하지만 고려 중기 이전까지 굴포천 유역 대부분은 개간되지 않은 습지였다. 그래서 부평지역의 경우 과거 비가 오면 물이 자주 넘쳤으며,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홍수가 나면 부평역 일대까지 침수되기도 했다. 

 19세기 초 조선의 재정과 군정의 내역을 집필한 ‘만기요람’을 살펴보면 800여 년 전인 고려 고종대 인물인 최이(崔怡)가 최초로 굴포천의 운하공사를 하려다가 만월산 기슭의 화강암 암반지대 굴착에 실패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운하 공사를 진행하면서 노역에 강제로 끌려나간 인부들이 공사 도중 간혹 죽기도 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 후인 조선조 중종대 우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굴포천 운하사업이 재추진됐다.

 김안로는 당시 삼남지방에서 곡식을 싣고 출발한 세곡선들이 지금의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손돌목’을 통과할 때 험난한 여울과 암초로 인해 난파사고에 시달려 한양에 도달하지 못하자 황해에서 가좌동 번지기 갯골∼굴포천∼김포 고촌 연사정에 이르는 운하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사업은 단단한 돌산을 굴착하지 못해 좌절되고 만다. 지금도 부평동과 간석동을 잇는 고개의 지명인 ‘원통이고개’와 ‘원적산’이 그 때의 역사를 말해준다.

 수차례 우회 수로를 뚫으려 노력했지만 또 다른 암벽을 만나 결국 운하를 하나로 잇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 굴착했던 인공 하천이 바로 지금의 굴포천이다.

 이후 굴포천은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자유곡류하는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는 굴포천 일대에는 군수물자 생산기지인 일본육군조병창이 들어섰다. 그 당시에도 굴포천 방수로 공사를 하려고 수로부지를 확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당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일제가 물러간 이후에는 조병창 부지는 대규모 미군 기지인 ‘애스컴 시티’로 변모했다. 

 1980년대에 들어 굴포천 일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굴포천의 옛 모습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지난 2016년까지 지방하천이었던 굴포천은 그 해 말 인천을 비롯해 서울, 경기가 각각 굴포천을 나눠 관리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국토교통부 중앙하천관리위원회를 통해 국가하천으로 승격된다.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 조감도. <사진=부평구>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 조감도. <사진=부평구>

 

 #생태하천 복원으로 변화하는 굴포천

 인천시 부평구가 최근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굴포천이 동식물을 만나는 생태하천으로 복원된다. 복원 구간에는 생태관찰탐방로와 수변쉼터, 워터 스크린 등이 조성된다. 

 물이 있는 곳에는 노랑꽃창포와 부들, 물가에는 갈대와 물억새, 갯버들, 금계국 등이 자리를 잡고 수변 끝 부분에는 이팝나무와 왕벚나무 등이 쉼터를 제공하게 된다.

 도심의 아이들은 이제 물길을 따라 학교를 오고 가며 두 눈으로 생태를 직접 관찰하고, 주민들이 산책하는 동네는 자연 힐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지난해 6월 본격적으로 착수한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부평1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부평구청까지 약 1.2㎞ 구간의 복개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는 사업이다.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단순히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사업이 아닌 생명과 역사, 문화의 물길을 다시 흐르게 하는 도시재창조의 핵심 사업이다. 이 사업은 ‘자연과 이야기하면서 걷고 싶은 하천 굴포천’을 슬로건으로 오는 2024년 5월 준공을 목표로 한다. 구는 올해 목표 공정률을 46.4%로 계획 중이다.

 사업은 ▶부평지역 문화자원과 연계한 도심휴식지와 친수공간 조성 ▶복개구간 철거로 옛 물길 복원 ▶수생태계 건강성 회복과 생물다양성 확보 등 세 가지 목표를 두고 시행된다. 

인천시 부평구 청사앞 굴포천 전경. <사진=부평구>
인천시 부평구 청사앞 굴포천 전경. <사진=부평구>

 우선 구는 부평1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부흥로 일대까지의 1구간을 생태·문화구간으로 조성해 기존 낙후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또 부흥로에서 백마교까지의 2구간은 생태관찰·탐방구간으로 지정, 수변 생태공간을 조성해 생물다양성을 높인다. 

 나머지 부평구청까지의 구간은 수로선형의 곡선화와 정수식물을 통한 수질개선으로 자연생태 복원구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주민참여마당을 비롯해 징검다리, 도시 숲, 생물서식처, 전망테라스, 수변쉼터마당 등을 굴포천 곳곳에 조성해 지역주민들이 자연 속에서 편하게 쉴 만한 공간을 만들 예정이다.

 특히 구는 도시재생사업인 ‘지속가능 부평11번가’ 사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방침이다.

 총 사업비 2천241억 원이 투입되는 지속가능 부평11번가 사업은 굴포천 구간을 비롯해 부평 캠프마켓 미군기지 오수정화조부지, 굴포먹거리타운에 이르는 22만㎡가 대상지역이다.

 임대주택과 상가, 공공지원센터, 푸드플랫폼, 공영주차장이 들어서는 혁신센터 조성사업과 굴포하늘길, 굴포문화누림터 조성 등 총 10개의 단위사업이 진행된다.

 구 관계자는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부평이 자연친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바탕"이라며 "굴포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을 통해 부평지역의 도시재생을 촉진하고, 부평이 생태·경제·문화 도시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우제성 기자 godok@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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