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아베 일본 전 총리가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인간적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앞서 짚어 봐야 할 바가 적지 않다. 애도라는 말을 그냥 쓰기에는 우리와의 관계나 향후 한·미·일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입장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아베 전 총리는 7년 전 미·일 방위협력지침 등을 개정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오늘날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기하며 ‘타이완의 유사 사태는 일본의 유사 사태’라는 인식을 거듭 밝혀 왔다. 한국에 대해서는 7년 전 ‘아베 담화’를 통해 더 이상 사죄할 수 없다며 딱 잘라 선을 그었고, 그해 말 위안부 합의 뒤에는 "합의에서 1㎜도 움직일 수 없다"고 단호히 한 바 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란 일본의 소설가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 근대사에 관한 소설 가운데 「언덕 위의 구름」(국내에서는 「대망」이란 장편 시리즈), 「료마는 간다」(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일본을 뒤흔든 역작으로 꼽히려니와 전후 일본의 역대 총리가 일왕에게서 내각을 꾸며 총리대신 지위에 오르는 선택을 받게 되면 반드시 찾아뵙고 국정 운영의 큰 방향에 대해 자문을 받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일본 국민들의 근현대사 정신을 형성하는 데 어떤 책자나 정치인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저술 활동에 대한 얘기는 아직도 일본인의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작가의 역사관 가운데 러일전쟁에 관한 부분은 당시의 한반도 문제와 더불어 살펴봐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는 러일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존재 자체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보고 동시에 조선 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 문제는 슬쩍 비켜갔다. 「언덕 위의 구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일본이 패배하게 된다면) 전국이 러시아 영토가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쓰시마 섬과 함대 기항지인 사세보는 러시아 조차지가 될 것이고 홋카이도 전역과 지시마 열도는 러시아 영토가 되리라는 건 당시의 국제 정치 관계로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물론 동아시아 역사도 그 후와는 다른 것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만주는 이미 개전 이전에 러시아가 사실상 주저앉아 버린 현실이 그대로 국제적으로 인정될 것이고, 또 이씨 조선도 거의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적어도 조선의 종주국이 중국에서 러시아로 바뀌었을 것이 분명하며, 더 말하면 일찍부터 러시아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마산항 이외에 원산항, 부산항이 조차지가 되고 인천 부근에 러시아 총독부가 출현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막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되면 인천 부근에 러시아 총독부가 출현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여기서 이기면 일본 총독부가 세워진다는 말인가. 실제 역사적 상황을 보면 더 깜짝 놀랄 일이 많다. 러일전쟁은 두 나라의 일대일 대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1905년 일본에게 한반도의 관리 권한을 인정한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프트-카츠라 비밀 거래’로 알려진 카츠라 총리는 고무라 주타로를 외상(外相)으로 임명했고, 그는 영국과의 비밀 협약에서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았다.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교섭으로 미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모두 1천만 달러에 가까운 전지 채권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때 곁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적극 부추긴 사람이 고종 황정의 정치고문이었던 주한 미국공사 호레스 알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광산, 철도, 전등의 권리를 넘겨주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그 자신도 운산광산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일본인과 같은 문명개화된 민중이 이 나라를 넘겨받아야 한다."

 도대체 나라 최고 통치자의 정치고문이란 자가 할 말인가. 그리고 그의 이런 발언이 지금 깨끗하게 정리된 역사의 에피소드에 불과한가. 이런 악담에 대해 오늘의 우리가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반성하며 우리의 미래를 성찰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