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가 기록한 일본의 메이지유신 직전의 역사 「막말사(幕末史)」에 보면 1853년, 인천 개항이 있기 30년 전 일본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앞바다에 등장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증기선 군함에 대해 이런 구절이 있다. "함대의 진행 속도가 몹시 맹렬해서 이걸 바라보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른바 ‘페리호 충격’으로, 이를 계기로 막부 정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태평양시대 동반자로 등장하는 일본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물론 대외적인 현상 속에서 미국의 알래스카 구입(이때 구입비가 7천200만 달러)으로 환태평양로(路)를 확보하는 과정이 맞물려 미·일의 협력은 더욱 강화됐다. 

 이리하여 근대국가의 기초를 다진 일본과 ‘태평양시대’를 여는 미국의 입장, 그때까지 세계의 해양을 지배하던 영국의 이익 균점이 이뤄지고 워싱턴에서 해군력 경쟁에 따른 해군 축소, 태평양과 동아시아 문제를 다투는 회의로 이어진다. 

 여기서 미·영·일은 해군력을 5:5:3 비율로 확정했으며, 이와 함께 중국 문제는 어느 국가 일반의 독점이 아니라 국제적 협상과 관리를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이 정해졌다. 이른바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 체제의 확립’이었다. 이 체제에서 미국은 태평양, 영국은 대서양에 집중하는 것으로 또한 중국 문제는 화약고로 남게 됐고, 태평양에서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이 향후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이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앞서 일으킨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마침내는 진주만 기습을 감행해 태평양전쟁이 벌어진다.

 미·영·일의 공존 시대가 끝나는 이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로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과 영국을 싸잡아 귀축(鬼畜)의 무리로 몰아붙이면서 우리에게 위안부 문제와 징용 문제 등 엄청난 상흔을 남긴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군사적 주도 파트너로 미국과 일본이 긴밀히 협력하는 판세가 전개되고 우리의 발언권은 별로 들리지 않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은 여전히 일본 국민의 의식 속에 살아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밀고 가는 추진 세력의 선두에 고(故) 아베 전 총리가 있었다.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덕분(?)에 대승을 거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숨지는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그가 특히 정열을 기울여 온 헌법 개정 등의 난제에 대응해 가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개헌을 실현하기 위한 국회 논의를 이끌어 가겠"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아베 전 총리가 주장해 온 헌법 개정의 요점은 평화헌법을 바꿔 자위대 명기를 분명히 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일본의 교전권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소위 평화헌법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간단히 생각한다면 동북아시아의 현실에서 일본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전권을 갖겠다는 시도가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제 나라를 스스로 지키겠다는데 이웃이 왈가왈부해서 곤란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이 택하는 길이 개헌과 군비 증강을 통해 중국·러시아·북한 등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에 머문다는 건 그리 믿을 바가 못 된다. 태프트-가츠라의 비밀 거래와 알렌의 악담은 여전히 여진을 남기고 있고, 일찍이 일본이 주창한 대동아공영의 그 망령이 주도 세력만 바뀐 채 미국의 지휘 아래 이뤄진다고 해서 우리가 안심해도 좋을까.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웃을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역사의 상흔마저 잊어버리고 우호적으로 대접할 수 있는 것인가?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과 손을 잡는다면 모를까, 아베 전 총리의 역사관과 미래관에 추종하는 정치세력에게 호의적 자세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무모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역사는 때로 기분 나쁠 정도로 돌고 돌기도 한다.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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