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공공기관에 노동이사를 두는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이 올해 국회 문턱을 넘었다. 개정안은 공공기관과 준정부 기관 비상임 이사에 3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 1명이 포함되도록 하는 내용이 뼈대다. 이에 따라 한국전력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포함한 주요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131개 공공기관은 노동이사를 임명해야 한다.

인천교통공사 영상회의실에서 ‘인천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발전과 정착을 위한 워크숍’이 열렸다.
인천교통공사 영상회의실에서 ‘인천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발전과 정착을 위한 워크숍’이 열렸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둘러싸고 기대감과 동시에 반발과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히 경영계는 노동이사제가 민간기업에 확산된다면 노조의 입김이 강화되고, 결과적으로는 기업 경쟁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반대로 경영계를 상대로 ‘과잉 우려’라고 꼬집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이사제는 독일·프랑스·스웨덴 등 유럽 19개국에서 이미 도입 중이며, 서울시는 2016년 9월 전국 최초로 노동이사제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산하 투자·출연기관을 도입해 16개 기관이 이미 운영 중이다.

인천시 또한 선제적으로 노동이사제를 운영 중이다. 2018년 ‘인천시 근로자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019년 7월 세부운영지침을 확정했다. 현재 인천시 산하 공사·공단 중 8개 기관에 12명의 이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인천시의 노동이사제가 노사 갈등 해소와 노사 동행을 보여 줄 만큼 현장에 정착됐다고 말해도 무방할까. 인천 공공기관 노동이사들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듣고자 지난 8일 오후 5시 인천교통공사에서 열린 ‘인천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발전과 정착을 위한 워크숍’을 방문했다.

이날 워크숍과 인터뷰에는 허우영 인천교통공사 노동이사, 김대영 인천교통공사 노동이사, 조성일 인천관광공사 노동이사, 김대원 인천도시공사 노동이사, 양진희 인천시설공단 노동이사, 오영길 인천환경공단 노동이사, 안홍민 인천문화재단 노동이사, 금한섭 인천의료원 노동이사, 신지윤 인천의료원 노동이사 등 총 9명이 참석했다.

노동이사제도는 노동조합에 비해 다소 낯선 개념이다. 노동이사제란 노동자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참석해 사업계획과 예산, 정관 개정, 재산 처분 등 주요 사항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고 발언권을 갖는 제도다. 이사회에 파견된 노동이사는 노동자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이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물론 노동이사제가 도입됐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장밋빛 미래만 펼쳐지지는 않는다. 경영권을 침해받는다는 경영계의 우려와 정반대로 현실의 노동이사들은 기존 이사회 운영의 들러리 신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안건 부의권도 마찬가지다. 현행법상 안건 부의권은 이사회 의장이 맡는다. 안건을 제출할 권한이 없으면 표결 외에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 결국 각 기관의 노동이사가 갖는 권한과 힘의 크기는 기관장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허우영 노동이사는 "인천에도 노동이사가 도입됐지만 제도 초반이다 보니 형식적인 부분만 겨우 갖추고 실질적인 지원이나 활성화 정책은 부족했다"며 "중심축 없이 기관별로 제각각 운영하다 보니 각자의 사정도 다르고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어려워 주기적으로 협의회 회의를 열어 발전 방안을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노동이사는 평소 회사에 고용되고 상사의 업무 지시를 받는 근로자 신분을 유지하다가도 이사회 의결사항이 있으면 이사로서 활동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때론 노동현장에서 감정 소모를 겪거나 노동이사 활동에 부담감을 느낄 때도 있다. 

김대원 노동이사는 "일반 직원 입장에서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업무를 수행하다가 노동이사가 제동을 걸게 되면 양쪽 사이에 낀 입장이 되기 때문에 노동이사의 활동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며 "나 또한 비상임이사로서 평소에는 고유 업무를 봐야 하고 회사의 경영정보에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중간자 입장에서 활동제약이 크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노동이사제 도입 후 이사회 다양성이 갖춰지면서 ESG 경영에 긍정적 영향을 체감한다는 반응도 많다. 

노동이사가 비록 소수지만 이들을 매개로 다른 이사들이나 노조, 노사협의회 등 다양한 대표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

김대원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비상임이사로 참석한 외부 전문가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식견이 높지만 한편으로는 조직 내부의 세세한 상황을 알기 어려운데, 노동이사제도가 시작된 이후에는 우리를 소통의 창구로 많이 활용하려고 한다"며 "이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노동이사에게 현장과 실무 상황을 물어보고 안건에서 혹시 놓칠 가능성을 짚어 보는 등 전체적으로 이사회가 활기를 찾은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노동이사들은 본인의 가장 큰 역할을 ‘노사 간 대화의 가교’로 규정한다.

오영길 노동이사는 "한 직원이 사업 수정을 요청하기가 어려워 마음고생을 하다가 노동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사회에 반영된 사례도 있다"며 "일반 직원들은 상사는 물론 노조위원장과의 만남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이사는 현장에서 함께 근무하다 보니 한결 편하게 면담을 요청하는 편"이라고 했다. 

직원 혹은 노동조합이 회사 측에 비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내용에 대해 노동이사들은 이사 자격으로서 대신 답변을 들어준다. 또 이사회에 참여하니 회사의 경영상태와 재무상태 등 데이터를 보고받고, 이 과정에서 회사의 어려움을 노조에 전달하기도 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입장 전달에 직원들이 신뢰를 갖게 되면 분배냐 성장이냐를 두고 다투던 노사 갈등이 줄어들기도 한다.

허우영 노동이사는 "노동조합원들과 경영진들이 각자의 입장에서만 주장하게 되면 한계가 명확해지지만 노동이사는 이중 신분을 활용해 각자의 고충을 이해시키기도 한다"며 "경영진들은 그동안 공개하지 않던 내부 속살을 드러내면서 투명성과 책임감을 갖고, 노동조합 측은 사측의 어려운 내막을 알게 된 뒤 양보하게 된다"고 전했다.

노동이사제도가 앞으로도 건전한 노사 동행문화로 정착하려면 현실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인천시는 조례와 시행규칙이 마련된 만큼 후속 대책 마련에 역점을 둬야 한다는 점도 당부했다. 

김대원 노동이사는 "현재 노동이사들은 공사·공단에 소속됐기 때문에 최종 임명권자는 지자체장이고, 시 산하기관이라는 점에서 지자체의 재정상황도 고려해야 할 때가 많다"며 "각 기관 내부뿐만 아니라 시장과의 소통채널도 확보가 돼서 의견을 나누고 활성화를 위한 정책 제안도 논의하는 자리가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노동이사의 경영권 참여 역량을 키우도록 교육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진희 노동이사는 "노동이사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경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며 "노동이사들이 이사회에서 제대로 의견을 피력하고 제 역할을 하도록 공공기관들이 교육·훈련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동이사들은 노동자들도 공기업의 경영 주체이자 이해당사자 입장을 이해해야 노사 동행이 실현된다고 분석했다. 특히 공공기관인 만큼 노사 동행에서 더 나아가 지자체와의 동행, 사회와의 동행, 시민과의 동행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도 드러냈다. 

김대영 노동이사는 "지자체와 공기업, 공공기관, 민간회사 모두 특정인이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방향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중에서도 공사·공단은 인천시민들이 주인이기 때문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해야 공적 서비스를 제대로 실현한다"고 주장했다. 

조성일 노동이사는 "우리는 사용인에게 고용되면서 수동적인 입장이 되기 쉽지만 경영에 참여하면서 변화 의지와 욕구가 생기고 능동적으로 회사 발전을 생각하게 됐다"며 "이러한 변화가 하나씩 모이게 되면 우리가 속한 공기업이 건강해지고, 끝에 가서는 정관에서 정의한 원래 목적인 시민의 복지를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김유리 기자 kyr@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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