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난 세대란 의미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돼 배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흥미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찾아 욕구를 충족하는 특징을 지닌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3~4살배기 아이가 스스로 유튜브 등 앱에 접속해 자신이 원하는 동영상을 찾아 즐기는 장면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국내에서 광고수익을 내는 유튜브 채널만 2020년 말 기준 9만7천여 개에 달한다. 미디어 발달의 영향이다.

 가속화된 미디어의 발달은 정치도 변화시켰다. 이른바 ‘팬덤 정치’의 등장이다. 극렬층의 지지로 대변되기도 하며, 21세기적 정치현상이기도 하다. 다만, 일부 극렬층의 지지가 전체 민심인 양 왜곡 표현되는 부작용도 따른다.

2002년 9월 30일 중앙선대위 출범식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노무현재단 제공>
2002년 9월 30일 중앙선대위 출범식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노무현재단 제공>

# 미디어 발달이 부른 팬덤 정치

지난 5월 8일 인천 계양산 야외공연장에 수백 명의 구름인파가 몰렸다. 인파의 절반 이상은 2030 여성들이다. 이들은 "아빠", "사랑해요" 등을 연신 외치며 환호하고 사진을 찍었다. 아이돌 콘서트장과 흡사했다. 이들의 환호 속에 등장한 인물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인천 계양을)의원이다. 이 자리는 이 의원의 6·1일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정식이었다. 구름인파는 이 의원의 열성 지지자다. 특히 진보 성향의 2030 여성들은 이른바 ‘개딸들’이다. 

개딸은 ‘개혁의 딸’의 줄임말이다.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기간 막바지에 등장했다. 이 의원이 ‘최후의 부동층’이라 불리는 이대녀(20대 여성)의 표심을 얻고자 82만 회원들이 활동하는 여초(女超)카페 ‘여성시대’를 찾아 자신의 지지를 호소한 일이 시발점이 됐다. 

이 의원의 남성 지지자는 ‘냥아들’ 혹은 ‘양아들’(양심의 아들)이라 불린다. 이들은 민주당보다는 이 의원 개인의 행보를 더 응원하는 강성 지지층이다. 필요에 따라 오프라인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주 무대는 SNS 등 온라인이다. 

이 의원은 국내 대표적 팬덤 정치인이다.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 활용해 여론을 움직인다. 대표적 사례가 경기지사 재임 시절 정부와 대척점에 섰던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다. 

정부는 소득하위 70% 지급을 결정했으나 이 의원을 중심으로 전 국민 지급 요구가 컸고, 결국 1차는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이 의원은 도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알리는 데도 SNS를 애용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팬덤 정치인 중 하나다. 주요 정책과 이슈를 트위터 등 SNS를 통해 공개하며 여론을 움직인 점 역시 이 의원과 판박이다.

지난 4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셀마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지난 4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셀마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 강성 지지층…훌리건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을 치른 2016년 미국에서 「Against Democracy」란 책이 발간됐다. 

저자는 미 조지타운대 제이슨 브레넌 정치철학교수다. 책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담겼다. 특히 정치적 팬덤주의를 언급하며 민주주의의 투표제도를 비판했다.

책은 미국 유권자를 3그룹으로 구분했다. 첫째가 호빗으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그룹이다. 전체의 과반인 사람들이 이 그룹에 속한다.

둘째는 훌리건으로 전체의 20~30%가 해당한다. 스포츠 훌리건처럼 자기 정치진영에 극렬한 찬성을 보내고 상대방을 폭력으로 꺾어 버리려는 부류다. 마지막은 미국 드라마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벌컨족이다. 소수지만 정치적 지식수준이 높고 선거에 합리적 선택을 한 유권자 그룹이다.

국내에서 정치인 팬클럽이 생긴 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층은 2000년 16대 총선 때 지역주의를 넘지 못하고 낙선한 노 전 대통령을 안타깝게 여겨 자발적으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했다. 이른바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청·장년층이 주축이 됐다. 당시 노사모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 후원금을 모금하려고 ‘희망돼지 저금통’ 투어도 벌였다. 

광주를 시작으로 20대 도시를 순회했는데 1차 정산금만 12억3천800만 원에 달했다.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 때도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계획, 이라크 전쟁 파병 등 굵직한 정책에 대해 진보·보수 모두 비판했지만 노사모만큼은 묵묵히 지지했다.

지난 6·1국회의원 보궐선거 선거운동 기간에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이재명 후보./연합뉴스
지난 6·1국회의원 보궐선거 선거운동 기간에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이재명 후보./연합뉴스

# 극단적으로 갈리는 평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달 21일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팬덤 정치에 대해 "대통령제를 취하는 국가에서 잘 관찰된다"며 "팬덤주의가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21세기적 참여민주주의의 형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정치적 집권주의가 가능하다는 점이 지역주의에 기반한 과거의 팬덤 정치와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유권자, 시민들, 정치리더들 사이에 언론이 매개 역할을 했지만 정보사회 진전이 가속화되면서 정치리더들이 직접 유권자, 시민과 소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권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실제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느낌, 즉 정치 효능감이 매우 크다"고 부연했다.

강성 지지층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이들은 이른바 ‘문자 폭탄’으로 당 지도부의 리더십을 흔들거나 뜻을 달리하는 인사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전체 민심을 왜곡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 교수 역시 "팬덤의 생각과 국민의 생각이 늘 같지는 않다. 오히려 최근에는 다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어 "팬덤의 생각을 국민의 생각이 다 그렇다고 판단하면 민심으로부터 위반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의원이 보궐선거 1주일을 남겨 놓고 전략을 수정해 지역 유세에 집중한 점이 한 사례다. 이 후보의 전략 수정은 ‘골리앗 vs 다윗’의 선거라는 예상과 달리 각종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혼전의 결과가 나온 탓이다. 팬덤이 민심을 가린 이유이기도 하다.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박용진(민주)의원은 "팬덤은 대중 정치인, 대중 예술인에 꼭 필요하다"면서도 "문제는 ‘악성 팬덤’으로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데 꼭 필요한 공론장 형성을 막는다"고 지적했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팬덤이 정치적·정서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며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특히 일반 유권자의 의사, 즉 민심이 정당에 유입되도록 하는 일이 지도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가상준 교수는 "팬덤 정치가 가속화되면서 팬덤 정치, 탈정치, 확증편향, 배제와 선택, 알고리즘 등의 현상이 같이 움직인다"며 "특히 상대방이 좋아하는 정당에 대한 혐오감, 적대감이 커지는 상황으로 문자폭탄 등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팬덤 정치 극복 방안에 대해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핵심 단어는 ‘혐오 정치’"라며 "이는 당심과 민심이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집단지성은 팬덤이 아닌 중도층에서 발생한다"며 "당 지도부는 그들(팬덤)의 영향력이 아닌, 일반 유권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경환 기자 jin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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