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는 전통적으로 ‘효의 고장’이다. 시민들의 마음속 한편에 자리한 효의 도시라는 자부심, 그 중심에는 ‘융건릉’이 똬리를 틀었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을 엿볼 만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정조가 재위하던 때에 융릉으로 능행을 자주 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명소로, 사적 제206호로 지정됐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산, 융건릉을 거닐었다.

조선시대 사도세자와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 ‘융릉’.
조선시대 사도세자와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 ‘융릉’.

# 융건릉의 역사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융건릉은 조선시대 왕릉군으로,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과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가 함께 묻힌 건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사도세자와 정조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역사 속 인물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차남으로 정실 아내는 혜경궁홍씨(헌경의황후)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사도세자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임오화변이다.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7월의 한여름 땡볕 삼복더위에 쌀 담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참변을 말한다.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기슭에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 뒤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뒤에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1800년 8월 18일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됐다.

21년 뒤 순조 21년인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한 뒤 정조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 오늘날의 건릉이 됐다.

# 능행차

정조대왕 능행차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행사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조선 최고의 길지인 화성시 융릉에 모시고 즉위 기간 동안 13번의 원행으로 효를 몸소 실천했다.

정조는 재위에 오른 이래로 매번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생각하며 그가 안장된 왕릉인 수원 융릉으로 참배를 가려고 능행했는데, 그가 머물렀던 한양 창덕궁을 출발해 한강을 건너 경기도 시흥군을 거쳐 수원군에 있는 융릉을 갔고, 능행 중 수원 화성행궁에 머무르면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이는 정조가 1800년 붕어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에 정조의 효행과 효심을 기리고자 서울시 종로·용산·동작·금천구와 경기도 안양·군포·의왕·수원·화성시가 합동으로 정조의 능행을 재현하는 행사를 매년 가을 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융릉으로 옮기는 ‘영우원 천장 재현’과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가는 원행 중 가장 성대하게 펼쳐진 을묘년 원행을 재현한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은 말 70여 필과 500여 명의 행렬단으로 웅장하게 펼쳐진다.

정조가 한양의 창덕궁을 떠나 수원군(현재의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릉으로 참배 차 능행했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로, 원래는 수원시와 화성시 관내에서만 열리다가 2016년부터 서울시와 경기도 안양·군포·의왕시까지 연장했다.

현재 능행은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에서 출발해 용산구 한강대로, 한강대교 노들섬(배다리), 동작구 노량진로(용양봉저정), 금천구 시흥대로(옛 시흥행궁), 금천구청, 안양로, 군포로, 의왕 경수대로, 수원시 장안로, 장안문, 화성행궁, 연무대, 대황교동(수원 화성 시계)을 거쳐 화성시 융건릉까지 이어진다.

그 중 죽어서도 융릉 아래 초장지에 묻힘으로써 효를 이어가고자 했던 정조의 효심을 현대에 다시 탄생시킨 화성시의 ‘정조 효 문화제’는 정조대왕 효의 장대한 서사시를 솔향 가득한 융릉에서 다채로운 전시·체험·공연 프로그램으로 펼친다.

화성시 정조 효 문화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융건릉 내부에서 최초로 개최된 축제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의 궁·능심의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축제인 화성시 정조 효 문화제는 정조대왕의 애민정신과 철학, 역사적 고증과 화성시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로 주목할 만하다.

2018년 최초로 재현돼 학계와 문화계의 눈길을 사로잡은 ‘영우원 천장 재현’은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서린 ‘만년제’에서 출발하며 시민들의 참여로 재현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조선 최고의 명당 융릉으로 이전하는 천봉 행렬은 오직 융릉이 있는 화성시에서만 만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정조 효 문화제는 최근 몇 년간 코로나19 탓에 축소되거나 중단했지만, 시는 앞으로 코로나19가 진정되면 행사를 다시 연다.

조선시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묘 ‘건릉’.
조선시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묘 ‘건릉’.

# 융건릉의 모습

융릉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태다. 1789년(정조 13)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했다.

진입·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됐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한 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고 다른 한 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이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 형태로 조각한 점이 독특하다.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으며,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 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었다.

공간 구성상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만한 점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으로,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이 아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따라 조성됐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능으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진입·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됐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화성시가 2018년 융릉제향을 시행했다.
화성시가 2018년 융릉제향을 시행했다.

# 관광지로서의 융건릉

융건릉은 83만여㎡의 넓은 터에 자리하고 내부에는 다양한 산책로가 조성됐다.

산책로는 총 4개의 길로 구성됐다. 긴 코스는 2.2㎞로 약 50분, 짧은 코스는 약 450m로 10분 정도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이어서 가족단위로 관광하기에 그만이다. 문화관광해설사를 운영해 자녀들의 역사 공부에도 안성맞춤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계절에 따라 변동)이며, 일반관람권 기준으로 대인은 1천 원의 비용을 받는다. 지역주민들에게는 50% 할인 혜택을 준다.

입구 재실 안에는 수령 약 200년이 된 개비지나무(천연기념물 제504호)가 있다.

융릉 입구의 금천교는 정조가 수원화성 행차 때 지나던 대황교동의 다리를 옮겨 다시 설치했고, 다른 묘역과 달리 수복방이 왼편 수라간과 같이 있다. 능침 고도가 낮아 능위에서 남향으로 내려다볼 때 수복방이 걸려서 위치를 바꿨다고 전해진다.

융건릉 인근에는 용주사가 있다.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원래 신라 말기인 854년에 지었으나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를 기리려고 정조의 명으로 18세기에 다시 건축했다.

정조는 폐사된 갈양사 터에 절을 새로 중창해 용주사라 이름 붙여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용주사는 이렇듯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이자 경기남부지역에 분포한 80여 사찰을 거느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화성=조흥복 기자 hbj@kihoilbo.co.kr

  박진철 기자 jch@kihoilbo.co.kr

사진=<화성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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