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아잔 브라흐마가 쓴 「시끄러운 원숭이 잠재우기」에는 짧지만 아주 강렬한 깨우침을 주는 우화가 있습니다.

 농부 두 사람이 닭을 키웁니다. 한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구니를 들고 닭이 밤사이에 낳은 달걀을 챙기러 닭장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달걀이 썩도록 바닥에 그대로 두고 대신 닭똥을 바구니에 채웁니다. 그러고는 그 바구니를 집 안에 가져옵니다. 그러자 집 안은 악취로 진동하고, 가족들도 고통스러워합니다. 다른 농부 역시 아침이면 닭장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바구니에 달걀을 채우고 닭똥은 썩게끔 바닥에 내버려 둡니다. 닭똥은 나중에 훌륭한 비료가 되니까요.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닭똥을 들고 오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잘 아니까요. 닭똥으로 인해 집 안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농부일까요? 혹시 닭똥을 들고 오는 농부처럼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화에서 말하는 ‘닭똥’을 사회생활을 해 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분노할 일’이나 ‘짜증스러운 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이 우화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 역시도 ‘닭똥을 들고 오는 농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승진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귀가한 아빠가 거실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초등학생 아들을 봅니다. 아빠는 슬그머니 다가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상사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귀가합니다. 그날도 아들은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아들에게 "너, 숙제는 하고 노는 거냐?"라고 묻자 아들은 "아뇨. 게임 끝나면 할 거예요"라고 답합니다. 그때 아빠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릅니다. "안 들어가? 이 녀석이 숙제도 안 하고 매일 게임에만 미쳐서 살아?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만약 화를 낸 원인이 숙제를 안 하고 게임을 하는 아들의 행위였다면 두 경우 모두 아들을 혼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들을 혼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똑같은 행동에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유하자면 닭장에서 내가 ‘달걀’을 들고 왔기 때문에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었고, 내가 ‘닭똥’을 들고 왔기 때문에 아들에게 화를 냈던 것입니다.

 아빠의 서슬퍼런 꾸지람은 이내 아들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집 안은 이제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이 흐릅니다. 그렇다고 아빠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의 게임이라는 성냥불이 아빠가 회사에서 들고 온 모멸감과 분노라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꼴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은 사태의 불씨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상사에게 받은 모욕감인 ‘부정적인 감정’, 즉 ‘닭똥’을 스스로 정화하지 못한 채 집에까지 들고 온 것이지요.

 닭똥을 들고 오는 농부의 어리석음을 비웃던 ‘내’가 ‘나’ 역시도 그런 행동을 버젓이 저지르곤 했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짧은 우화입니다. 

 어리석은 농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어떤 감정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곰곰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닭똥’을 들고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날마다 우리는 달걀을 들고 오기도 하고 닭똥을 들고 오기도 합니다. 이게 삶이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알 듯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닭똥을 선택하게 하고, 긍정적 감정이 달걀을 선택하게 한다는 이치를 말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에 잠겨 봅니다. "나는 지금 달걀을 들고 오는 걸까, 아니면 닭똥을 들고 오는 걸까?"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