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최윤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윤상, 왔느냐? 그동안 잘 지냈느냐? 원하는 자리에 앉거라." L선생님의 대구 사투리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모 수학학원 L선생님은 의무교육 12년간 만났던 선생님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다. 부모님뻘 나이의 L선생님은 그렇게 크지 않은 체격에, 똘망똘망한 눈과 자글자글했던 눈가 주름이 인상적이었다. L선생님은 엄청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대 중퇴’, ‘카이스트 졸업’. 

"선생님 내일 영어 어휘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단어를 빨리 외울까요?" 이런 식으로 나는 수학 외에도 L선생님에게 공부와 관련해 궁금증이 생기면 바로 물어봤다. 그럴 때면 L선생님은 자신의 일화와 함께 공부법을 알려 줬는데, 그 이야기가 재밌어 일부러 공부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종이에 쓴 ‘speed’를 ‘s-p-e-e-d, 스피드, 속도’라고 반복하는 방식을 설명하며 집과 학교가 멀어 항상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학교까지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식이다. 같은 식으로 2년간 학원에 다니며 L선생님에게 무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종합한 L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정의된다. 산업화 시절의 보편적 ‘가난’이었는지 당시 관점에서도 ‘극심한’ 가난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L선생님의 어릴 적 꿈은 발명가였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배움을 좋아했던 L선생님에게 이런 꿈은 강력한 학습 동기로 이어진 듯했다. L선생님은 당당히 1985년 대구 고교 선발 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 일로 신문에도 출연해 그 기사는 학원 벽면 액자에 붙어 있다. 

그렇다면 대구 최고 명문고인 경북고에 입학해야 했었다. 과거 비평준화 ‘명문고’ 학교들의 위상은 그때의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L선생님은 경북고가 아닌 경북대 근처 모 고등학교를 입학했다. 돈 걱정 없이 공부할 환경이 중요했을 게다. 배움을 즐겼던 L선생님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다. 수험 공부와 배움의 즐거움은 별개라는 사실이었다. 견고한 득점을 위해서는 무한정 문제 풀이를 반복해야 했다. 읽고 싶은 책도 읽지 못했다. 1987년 경북대 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됐다. 6월 항쟁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다. 

수학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자 그 스파르타식 공부를 강요하던 사람이 "여러분이 공부 때문에 바쁘겠지만, 세상이 말도 아닙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화가 났으면 사장을 포클레인에 태우고 안 내려 줄까요?" 무심코 공부하던 L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의 뜻밖의 이 말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L선생님은 그때의 기억이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해 주셨다.

L선생님은 목표했던 카이스트 본고사에 떨어지고 대신 서울대학교 농공학과에 입학했다. 카이스트는 사관학교와 더불어 유일하게 학비가 무료인 학교였다. L선생님에 따르면 농공학과에서는 농사 실습이 있었던 모양인데, 남들은 다 도망가도 본인만 우직하니 남아 즐겁게 밭을 갈았다고 한다. 평소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떠올리니 친구와 웃음을 참았던 기억이 있다. 다음 해 L선생님은 다시 시험을 보고 카이스트에 합격했다. 큰 문제 없이 대학을 졸업 후 그는 발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특허사무소에서 3년 일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 학원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의 삶을 돌아봤을 때 가장 큰 키워드는 이상과 현실 사이 괴리인 듯했다. 안빈낙도를 즐기는 L선생님의 모습은 신선 같았다. 그렇지만 약간의 현실감을 가진, 매일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주변의 산을 오르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적적하지만 또 매일 새로운 얼굴을 보게 되는 학원 선생님의 삶에 만족하는 듯싶다. 나는 그에게 혼자 공부하는 방식을 배워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원을 그만뒀다. 대학 합격이라는 나름의 성취를 거둔 후 선생님 중 L선생님께 가장 먼저 알렸다. 나에게도 그와의 추억은 깊이 남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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