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차에서 내려 내 연구실이 있는 ‘한국연구쎈타’가 있는 건물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순간 얼굴이 찡그려지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해 온다. ‘University Boulevard(대학대로)’ 옆에 희고 단단해 보이는 돌로 세운 특유의 중국식 문이 위압적으로 서 있다. 홍살문 형태의 위쪽 돌현판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중국의 옛날 관청이나 학교 건물의 양식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물 위로 세운 무지개 돌다리를 건너 문을 통과하자마자 저 멀리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공자 동상이 눈길을 빼앗는다. 등을 돌려 문의 안쪽을 보니 텅 빈 공간 안으로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걸음걸이들이 눈에 걸린다. 다시 눈을 올려 뜨니 문루 안쪽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써 있다. 철저히 공자를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경복궁에 들어가 근정전 앞의 돌로 만든 길을 걸어가듯이 중국식 바닥에 까는 잿빛 벽돌들 위를 걸어간다. 한 개, 한 개마다 중국의 문양들(실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중앙아시아에서 들여온 소재들이 많지만)이 박혀 있고, 중간중간에는 ‘인의예지신’을 비롯한 공자와 연관된 글자들이 도드라져 있다. 그리고 높다란 단 위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땅딸막한 공자가 판단하기 힘든 분위기의 눈길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왼쪽의 허리춤에 긴 칼을 차고 있었다. 공자가 칼(刀)을 소유한 ‘자(子)’인가? 그는 수레에 책을 싣고 다니면서 독서를 하고, 자신을 따르는 3천 명의 제자들에게 인(仁)과 도(道)를 논하면서 세상에 평화로움을 설파하던 유세가인데, 누구의 어떤 발상으로 이러한 형태로 디자인했을까? 

엘빈 토플러는, 사실 그는 2000년대 초 「POWR SHIFT(권력이동)」를 펴내면서 21세기 신질서의 3축으로서 워싱턴, 베를린 그리고 도쿄를 뽑았다. 무지인지, 경망스러움인지, 노회한 술책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는 베이징을 제외시켰다. 강의하는 도중에 학생들에게 몇 년 후 그 결과를 보자고 웃으면서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바로 얼마 전에 「NEXT DECADE」를 펴낸 조지 프리드먼에 이르기까지 서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위 석학들은 실수를 저질렀다. 중국 문화와 역사를 대충 알았기 때문이었다. 역사학자인 나는 당연히 2003년 11월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를 발표한 후 「역사전쟁」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신중화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그 앞에 선 채로 약간의 목례를 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공자가 동이인이고, 그래서 우리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깊은 문화의 블랙홀에서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다. 나는 그가 중국인이기 이전에 인류의 일원이고,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선사하고,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지역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나는 그와 같은 학자이기에 선배로서 존중할 필요는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로에서 바라다보면 마치 이 대학, 사마르칸트주 국립대학의 중요한 건물이 공자학원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3층에는 그나마 유인영이라는 민간인의 힘으로 만든 것이지만 ‘한국연구쎈타’가 있지 않은가.

최근에 들어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시각들을 많이 변화시키고 있다. 뼛속까지 사대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힌 노년 세대들보다 젊은이들이 더 현실을 자각한다고 하니 덜 우려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실체, 특히 현 정권의 정책과 전략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동북공정의 실체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일대일로, 중국몽 그리고 공자학원 등을 잘 알 리는 없다. 

이미 서남공정, 서북공정을 추진해 온 중국 정부는 후진타오 정권 후기부터 동북공정을 시작했다. 해양강국론을 선언했으며, 이미 주석으로 결정된 시진핑은 부주석 시절에 신형대국관계를 미국에 선언했다. 시진핑은 주석 자리에 오르면서 엄청난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며 군사대국화를 추진했고, 소위 남중국해(동남아시아 지중해) 등을 비롯해 해양영토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에 도전하고 태평양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2013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일대일로’ 정책이고, ‘중국몽’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병폐와 근거 없는 논리가 있다. 학자들은 현실적인 이익과 관계를 맺지 않아야 좋다는 것이다. 그걸 흉내 낸 예술가들, 심지어는 철저하게 자본에 의해 존재가 강한 영향을 받는 대중문화 종사자들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편하게 살고 싶었고, 고난으로 가득 찬 현실을 외면해 온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자기방어 논리를 답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지금도 그와 유사한 생각에서 현실을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원래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이고, 생활에 기초했다. 다만 독특한 역사적 환경, 예를 들면 반 정도의 세월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탓에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는 발현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청나라가 쓰러진 후에는 중화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서 공산주의자인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원들도 사실은 민족주의자였다. 신중화제국주의를 목표로 쑨원, 마오쩌둥, 덩샤오핑과는 다른 중국몽을 실천하는 그들이 택한 또 하나의 전략이 공자학원의 건립과 확장이다. 공자학원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삼은 공자학당을 포함해 주로 국외에 설치한 일종의 교육기관이다. 때문에 정식 명칭은 ‘Confucius Institute’이며, 한국에서는 편하게 ‘공자 아카데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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