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김광석의 주옥같은 노래 중 ‘슬픈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어느 한 구절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볼 때 (…) 슬픈 노래를 불러요 슬픈 노래를"이라는 구절입니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봤을 때 그는 왜 슬픔을 느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호기심의 유무’라고 합니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교육이나 경험이 미흡해 아직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늘 관심이 많고, 이 관심이 호기심으로 이어져 사물을 관찰하게 되고 학습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교육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해집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내 기준만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준만을 강요하고, 그 기준을 따르지 않을 때는 꾸지람을 하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의 심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서서히 의존적이고 수동적 태도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를 두고 김광석은 ‘슬픈 노래’를 불러야만 했을 겁니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것에 대해, 아이가 호기심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에 불을 지피는 열정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말입니다.

가네히라 케노스케의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에 나온 자녀 교육에 관한 글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 봤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칭찬해 줘라."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은 모두 그림을 좋아해. 그런데 2학년이 되면 80%로 줄어. 6학년이 되면 정반대가 돼 80%가 싫어해. 이유는 지나치게 잘못된 부분만을 지적받았기 때문이야."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오래전 초등학생이던 제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는지가 떠올라 너무나 부끄러웠고, 이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채사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재수 시절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글 중 한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사회문화’ 과목을 가르치던 나이 많은 선생님이 별 모양을 칠판에 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별 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별 모양의 지식이 담긴 책을 읽으면 될까?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 될까?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란 지식을 얻을 수 없어. 지식은 그런 방법으로 얻는 게 아니야. 다른 책을 펴야 해. 삼각형이 그려진 책,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거야."

‘별’에 관해 알고 싶어 할 때, 어른들은 ‘별’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들은 ‘필요없는’ 것이므로 시간 낭비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매우 효율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삼각형이든 사각형이든 원이든 상관없이 관심이 큽니다.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노력과 경험이 쌓여 결국에는 별 모양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까지 눕거나 앉은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던 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에 도전해 마침내 우뚝 선 자세로 바라본 세상은 경이로울 겁니다. 이런 경이로움은 바로 호기심이 만들어 낸 축복입니다.

이런 이유로 W. 워즈워스는 "위인은 하루 한 번 어린아이가 된다"고 말했고, 앞에서 전해드린 책의 저자인 가네히라 케노스케도 "‘자신 이외에는 모두가 선생님’이라는 말보다 더 멋진 말은 ‘언제나 학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