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도에 개봉해 이제는 공포 스릴러의 고전으로 불리는 영화 ‘양들의 침묵’은 한니발 렉터라는 기념비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영화 속 최고의 악당으로 손꼽히는 희대의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섬뜩한 이미지는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으로 가능했다. 2시간 중 단 15분만 등장했음에도 한니발 렉터의 장악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잊지 못할 명연기를 선보였다. 그 뿐만 아니라 공포영화로서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무섭고 끔찍한 장면을 통해 불안을 극대화하는 장르적 특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서사도 밀도 있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 공포영화의 교과서가 된 ‘양들의 침묵’을 만나 보자.

클라리스 스털링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수사국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FBI 수습요원이다. 그녀는 지하 감옥에 8년째 수감 중인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만나 보라는 지시를 받는다. FBI는 전직 정신과 의사인 렉터 박사와의 면담을 통해 흉악범의 심리를 파악하고자 했다. 특히 현재 진행 중인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을 추적할 단서를 얻는 것이 스털링의 목표였다. 

수감소 가장 깊은 곳, 여러 겹의 철문을 지나 복도 맨 끝에 한니발 렉터 박사가 있었다.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올백으로 넘긴 헤어스타일과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단정하게 수의를 입은 렉터 박사는 뜻밖에도 60대 노인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눈은 깜박임 없이 상대를 직시했고, 분석적이고도 예리한 지각과 동물적인 후각으로 박사는 언제나 상대를 빠르게 간파했다. 스털링 또한 첫 대면만으로도 불우했던 지난날이 소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털링은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면담을 이어갔다. 

스털링의 프로다운 모습을 신뢰한 렉터 박사는 범죄 프로파일링에 도움을 주면서도 스털링의 심연을 건드려 트라우마를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일찍 부모를 잃은 스털링은 삼촌의 목장에서 생활했는데, 이때 밤늦게 도축되는 양의 울음소리를 듣게 됐다. 한 마리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어리고 힘이 없던 스털링은 그럴 수 없었다. 이후 공포에 질린 양들의 울음소리는 가슴 깊이 상처로 남게 됐고, 이것이 그녀가 FBI에 지원한 이유이자 범죄 피해자를 구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양들의 침묵’은 인물 내면의 아픔을 끄집어내어 트라우마 극복을 통해 더 큰 자신으로 성장해 가는 클라리스 스털링의 모습을 정교하게 담아냈다. 희대의 악당이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렉터 박사는 범죄자 체포를 돕고, 나아가 주인공이 내면의 공포와 결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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